‘막돼먹은 영애씨’ 배우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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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돼먹은 영애씨’ (tvN) 시청자라면 김현숙을 이영애로 부르기가 낯설지 않다.

2007년 시작, 햇수로 9년을 이어온 이 국내케이블 최장수 시즌제 드라마에서 뚱뚱하고 못생기고 히스테리 충만한 삼십대 노처녀 역할을 실제처럼 연기해온 그녀인지라, 이제는 본명보다 주인공 이름이 더 익숙해진 탓이다.

심지어 어떤 팬들은 영애 캐릭터를 ‘노처녀의 대통령’이라 부른다. ‘아기들의 뽀통령’ 비슷한 거다.

이름은 ‘친절한 금자씨’의 배우와 같은 이영애인데, 막돼먹었단다. ‘막돼먹다’란 못 배우고 마구 자라 버릇없다는 뜻이지만, ‘막영애’(막돼먹은 영애씨의 줄임말)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막돼먹은 건 정작 그 주변의 인물들이고 현실의 사회임을 금세 알 것이다.

영애는, 아니 김현숙은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했을 뿐이고.

‘전원일기’(1980-2002)의 최불암과 김혜자 빼고 이처럼 오래 가는 드라마에서 주연을 계속 맡아온 배우는 국내외 어디서든 매우 드물 것이다. ‘막영애’ 팬들은 14번째 시즌이 시작되는 이달 8월 10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덕(?!)이거나 혹은 세월이 제법 흐른 탓이겠으나, 2005년 일요일 밤마다 ‘개그콘서트’ (KBS2) 피날레를 화려하고 빵빵하게 마무리하던 ‘출산드라’와 요즘의 ‘막영애’를 단번에 김현숙으로 일치시키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지금 일이십대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대사, 기억나는가?

“날씬한 것들은 가라! 이제 곧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네 시작은 비쩍 곯았으나 그 끝은 비대하리라! (물개 박수를 치며) 먹다 지쳐 잠이 들면 축복을 주리니…!!”

사이비 교주 차림새로 구호처럼 출산과 모유수유를 선동하고, 음식을 의인화하는 개그로 지나치게 마른 몸매를 지향하는 외모지상주의 사회를 통렬히 풍자하면서, 김현숙은 일약 스타가 됐다. 그때 직접 쓴 대사들은 ‘출산드라 어록 (語錄)’으로 길이 남았다.

“돼지 선생님은 우리 안에서 100일 동안 스스로 녹차를 먹으사 녹차 삼겹으로, 와인에 몸을 담그사 와인삼겹으로 희생하셨습니다. … 고등어 선생님께서는 소금의 핍박에 굴하지 않으시고, 마른 것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뜨거운 석쇠 위에 스스로 몸을 던지사 그렇게 불타올라 죽으셨습니다!”

김현숙은 인기 절정의 ‘출산드라’ 코너에서 8개월 만에 돌연 스스로 하차, 이듬해 영화 ‘미녀는 괴로워’로, 이후 ‘막영애’ 시리즈와 뮤지컬 ‘넌센세이션’ 등으로 종횡무진 연기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리고 지난해 결혼, 올해 아들을 ‘출산’해 이제는 엄마가 된 그녀를 갓피플이 만났다. ‘출산드라’ 시절부터 모태 기독교인임을 밝혀온 그녀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글 이한민 사진 도성윤

지금 이십대도 ‘출산드라’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개그콘서트 팀에 들어가 한 4개월 준비하고 선 무대였는데, 첫날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개콘에 저를 추천해준 분이 갈갈이 박준형 씨였는데, 나름 자랑스러우셨을 거 아니에요?

방송나간 후 흥분하며 전해주신 말이 “출산드라 나올 때 분당 시청률이 40퍼센트가 넘었다”는 거예요. 전 속으로 놀랐죠. ‘나는 부산 가시낸데, 와 서울도 아이고 분당 사람들이 내를 좋아하는고?’ 나중에야 그 뜻을 이해했는데, 그건 정말 대단한 기록이었대요.

첫 회 방송 나가자마자 프로그램 게시판 반응도 뜨거웠어요. 게시글이 너무 많아 하루만에 100페이지가 넘었거든요. 재미있다는 평도 많았지만 기독교인들끼리 논쟁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사이비 교주를 흉내 낸 건데, 그걸 기독교 비하로 오해한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반대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고 두둔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하여튼 그래서 직접 나서서 “저 모태 기독교인이에요. 우리 엄마는 권사님이고요,

저희 오빠랑 남동생이랑 삼 남매 어려서부터 아무리 가난해도 교회 안 빠지고 기도하고 살아왔어요!” 간증도 하고 그랬죠.

어머니가 기도와 믿음으로 삼남매를 키우셨다고요.
엄마가 혼자되실 때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처녀 때부터 20년 넘게 청소년 상담을 하시고 복지에 대한 비전을 품고 계셨다고 해요.

문제 있는 학생들을 막상 만나보면 부모 사랑을 못 받았다든가, 결국 중요한 시점에 부모들이 반응해주지 못했을 때 뭔가 관심을 받으려고 엇나가는 것이지, 아이들 잘못은 아니란 걸 아셨대요.

그래서 부모 교육부터 해야겠구나, 필요성을 느끼시고 어머니집이라는 복지관도 하셨는데, 어려서 저는 그 때문에 엄마한테 애증을 느끼기도 했어요.

나도 힘든데 엄마는 내 얘기도 못 들어주면서 다른 아이나 상담해 주고, 우리 가족도 살기 힘든데 남들 돕고 하는 게 잘 이해가 안 됐죠.

그런데 이제 제가 나이 좀 들고 아기도 낳고 보니 우리 엄마가 정말 대단하셨다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사회적인 리더십을 봐도 그렇고 엄마로서도 그렇고, 같은 여자로서 봐도 대단하시다 싶어요.

그때는 어머니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커서 알았는데 카드 8개를 돌려 막고 살기도 하셨더라고요.

그런데도 저희 삼남매에게는 신세한탄 한번 하신 적 없고, 입버릇처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만 가르치셨어요.

또 몸소 믿음대로 진취적으로 사는 걸 실천하셨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 증거하는 삶을 살아오셨어요. 저희 엄마는 믿으면 1퍼센트도 의심을 안 하시는 분이에요. 힘들어도 항상 자식들 위주였고.

일례로 살던 해운대 집을 비워야 해 고등학교 땐가 학기 중에 기장 쪽 시골로 이사 가게 됐는데, 하교하고 찾아가 보니 약도가 필요 없더라고요. 버스 정류장과 정류장 사이 허허벌판에 그 집 하나뿐이었거든요. 아침 등교할 때면 버스가 안 서니까 새벽같이 나와서 지나가는 차 얻어 타기도 하는 걸 엄마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울고 기도하셨던 모양인데, 세상에, 이사 간 지 보름 만에 집 앞에 버스 종점이 들어서는 거예요! 기사 아저씨에게 “이 우예 된 일인교?” 물으니 “내사 마 모른다!” 하시더라고요. 그런 일, 많았죠.

그랬던 우리 엄마, 몇 해 전에 사모님 되셨어요. 밀양에서 목회하시는, 이제는 우리 아버지 되신 목사님 하고 뜻이 맞아 구제사역 같이 하시는데, 5일장 여는 날이면 장터에 나가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밥 드리는 봉사활동 하세요.

세브란스 나온 우리 오빠, 저 순대 써는 알바 할 때 “돈 오천 원만 도고. 여친 생일선물 사주게” 하다 제 손의 순대로 빰 맞은 그 오빠는 지금 피부과 교수 의사 돼서 의료봉사 많이 하고요.

얼마 전 안수 받아 목사 된 남동생은 고향 해운대에서 목회하는데요, 엄마처럼 청소년 사역한다고 아버지 교회에서 무료로 청소년 수련회 개최해서 저 내려와 간증하고 애들 상담하라 그래요.

얼마 전엔 바빠서 “이번엔 내 안 내려가면 안 되나?” 그랬다가 “누나야, 이 일이 주님 앞에서 우리 남매가 받은 비전 따라 하는 긴데 자꾸 미루면, 그거 아니데이!” 훈계만 잔뜩 들었죠.

성장 과정에서 원망이나 아픔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럼요. 원망 많이 했지요. 어릴 때 일기장에 “왜 나는 이런 집에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그러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울고, 세상에 혼자인 것 같고, 하나님이 있다는데 진짜 계시는 거 맞나 그러고.

저는 환경 탓인지 또래보다 좀 조숙했고 성향 자체도 남달랐던 것 같아요.

욕심도 많아서 오빠처럼 서서 소변보겠다고 고집 피우고, 그래서 엄마는 제가 비정상인가 싶어 신경정신과 같은 데 가서 상담을 받게 했어요.

아이큐 검사 같은 걸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들으니 원장님이 저라는 아이는 잘못된 게 아니라 축구공 같아서 튀기면 더 튀겨나가니까 누르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응원해주면 뭐가 되도 될 아이라고 그러셨대요.

버스정류장도 없던 외딴 데 이사 가서 가건물 같은 집 꼭대기 방 두 개에 네 식구가 살던 때 일인데요, 딸이라고 저한테 작은 쪽방을 주는데 침대 하나 들어가니까 꽉 차더라고요.

천장도 낮고 창문도 작아서 답답해하다, 엄마가 속상해 할까봐 엄마 잠든 다음에 조그만 마당에 나가 봤어요.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보는데 오히려 별이 많고 시내보다 공기도 좋고, 문득 ‘하나님은 공평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상하게도 그때 들었던 확신은,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이 궁지로 몰린 이상 하나님이 오히려 나를 여기서 더 정체되게 하지는 않으시겠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이후로는 마음이 달라졌지요.

지금은 터널 뚫렸지만, 그때는 학교 가려면 송정고개라는 데를 구불구불 버스 타고 넘어가야 했는데, 처음엔 정류장도 없으니까 30,40분 더 일찍 나와야 했어요.

그러니까 여름에는 송정 바닷가에 해 뜨는 것도 보고, 너무 좋은 거예요!

오히려 정서적으로는 더 풍성해지는 것 같고, 제게 배우 달란트가 있다는 걸 알고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나서는 어려서 겪은 고생들이 오히려 원망에서 감사한 기억으로 바뀌더라고요.

모태신앙이었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때가 청소년 때였을까요?
그렇죠. 고등학생 시절.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자체는 초등학교 때 이미 생긴 것이고, 솔직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믿지 못한다면 원망도 나오지 않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이 계시니까 불평도 하는 것이고, 이전 일기장 보면 하나님에게 원망도 많이 했어요.

엄마 아빠한테 말할 상황이 아니고 딱히 말할 데도 없으니까, 일기장에 쓰거나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됐어요.

연기에 은사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5학년 때였을 텐데, 뜬금없이 선생님이 숙제로 12년 살아온 전기를 써서 발표해 보라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제가 몹시 얌전했어요.

혼자 있고 내성적이고 상처도 많고, 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좀 엇나가고 자존감이 낮았던 것 같아요. 발표 같은 건 생각도 못했죠.

그러다 그 전 주말, 토요명화 시간에 한국영화를 보게 됐는데 약장수가 나왔어요.

“하늘 나는 저 새를 봐! 힘이 없어? 아니야. 그건 영양실조야! 이 약 한 번 잡숴봐!” 그거 보고 왠지 나도 저런 식으로 재미있게 극 중 극 쓰듯 써보면 될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학교 가서, 선생님이 더 발표할 사람 없으면 끝낸다 하실 때 손들고 나갔죠.

남들은 “저는 1978년 몇월 며칠 어디서 태어났고 장래 희망은요” 그랬는데 저는 “자, 때는 1978년이야! 현숙이가 응애 응애 태어나는데…” 하고,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는데 일인 몇 역을 하고 났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어요. 아이들이 놀랐던 것이죠.

이윽고 “와!!” 하고 박수를 쳐주는데, 처음으로 박수 받는 희열이라는 걸 느낀 겁니다. 그러면서 제 성격이 180도 변해가기 시작했어요.

중학교 가서도 연극하고 교회 성극은 도맡아 해서 인근 동네에서 구경을 오고요, 고등학교 가서 전교 행사 했다 하면 학교 명물 소리 들어가며 교장선생님도 아실 정도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교회 촌극을 하는데 중학교 때 대본 짜고 연출하고, 제가 기생 라합 역 맡아 한복 입고 등장할 때부터 춤추고 재미있게 했지요.

엄마는 그런 저를 못마땅해 했지만 오빠는 자기에게 없는 기질이라고 저를 많이 응원해줬어요.

모범생 오빠가 공부 말고 보는 하나가 개그콘서트였는데, 제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좋아해준 것이죠. 저는 나중에 거기 출연하게 된 거고.

원래 희극은 비극을 먼저 이해해야 연기할 수 있는 거라고 하던데, 맞나요?
그럼요. 희극이란 게 진정 눈물을 뛰어넘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저는 고생하고 살았던 것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지금 이렇게 (막영애 같은) 연기를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어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개그우먼으로 데뷔하는 과정에 특별한 사연이 많았다지요?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연극반을 하고 부산 경성대학 연극영화과를 다녀서 원래 제 연기의 시작은 연극과 뮤지컬이었어요.

사실은 개콘에 나오기 한 6년 전인 대학생 때, 갈갈이 박준형 씨가 KBS 방송팀을 따라 부산에 내려온 기회에 눈에 띄어 일찍 데뷔할 수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땐 왜 그랬는지 저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보통 그런 제안을 받으면 바로 응했을 텐데 말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연기는 제가 평생 할 일이고, 공부하고 경험할 게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실은 대학 가려고 재수할 때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 많이 해봤거든요.

해운대시장 남천할매 떡볶이 집에서 하루 12시간 순대 썰어보고, 연기학원 다닌다고 학비 벌려고 서면

부근 명동칼국수 집에서 종일 양파 깐 냄새 풍기고 학원 갔다가, 막차 타고 집에 가서 서너 시간 자고

다음날 또 출근하는데, 하루는 너무 피곤해 출근길 순환 버스가 다시 집 근처에 돌아온 것도 모르고 잠을 잤어요.

주방장 구박 들을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데, 쉬고 싶어도 쉴 선택권조차 없다는 게 너무 힘들더군요.

그래놓고 대학 다니며 이런저런 무대 서보고, 서울 올라와 미아삼거리역 부근 옥탑방 구해놓고 춘향전을 현대화 한 ‘펑키펑키’라는 공연에 3차 오디션까지 봐서 출연하게 됐거든요.

제 역할이 춘향 엄마 월매였는데 처음 대사는 한 두세 마디뿐. 그런데 제작자인 컬트 초기 멤버 정성환 씨가 대사나 역할에 창의적인 제안을 늘 열어두셨어요.

제가 두 달 동안 날마다 새 대사를 만들어갔더니 나중엔 제 분량이 40분까지 늘었잖아요. 잠깐 불 켜놓고 관객들 하고 노는 시간까지 가질 정도로.

그걸 개그우먼 김지혜가 보고 개콘 하던 준형 씨에게 제 이야기를 전한 거예요. 나중에 둘이 부부가 됐는데, 전 둘이 아는 사이란 것도 몰랐었거든요.

“오빠, 너무 잘 하는 언니가 있는데 부산에서 대학 나오고 이름이 김현숙이고…” 그러는데 “누구라고!” 놀라면서 제 기억이 나더라는 거예요. 절 찾아왔죠.

그때도 바로 결정 못하고 한 세 번 고민했을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이분법적 선입견이 있어서, 개그로 연기를 시작하면 그 이미지가 고착되곤 하니까요.

또 희극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나는 평생 배우로 살아갈 건데 한번 이런 경험도 가치 있겠다 생각해서 어렵게 들어선 무대 내려놓고 개콘팀으로 옮겼고, 지금 코미디 빅리그 하시는 김석현 피디님이 이끌어주셔서 몇 달을 준비해 무대에 올린 게 ‘출산드라’였던 겁니다.

현숙 씨는 선택의 기로에서 특별한 결정을 잘해왔던 것 같아요.
일반 기자들도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실패하는 결정을 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그럴 때마다 저도 속으론 고민 많이 했어요.

대신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은 사람하고 의논하고 결론 내리진 않았고요, 저 스스로에게 자신 있는지를 물었고, 하나님과 대화하듯 혼자 묻기는 했어요.

그건 엄마가 저에게 심어주신 믿음과 자존감 덕분이고, 지혜와 확신이 생기는 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대학생 때 처음 방송출연 제의 받을 때 바로 응하지 않았다가 6년 뒤 기회를 얻은 거나,

출산드라 한참 뜰 때 스스로 내려온 거나, 10년 가까이 막영애 하게 된 거나,

그러니까 저 나름대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왔던 것 같아요. 감사하고, 은혜죠.

사명 같은 기도제목이 있을 텐데요.
엄마가 입버릇처럼 저희 남매에게 은근히 압박하듯 심어주신 것이 기도합니다만, 청소년 선교에 대한 비전이 제가 받은 부담감이고 기도제목이에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청소년수련원 같은 걸 세우는 건데요, 우선 어머니 계시는 밀양에 먼저 세우게 될 것 같아요.

이건 엄마의 오랜 비전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저희의 비전이 되고 있는 것이죠. 그걸 위해 물질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올곧게 해나갈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엄마로서 아이 잘 키우는 것, 부모로서 지혜롭게 하나님 뜻에 합당한 방향대로 양육했으면 좋겠고요. 저 혼자 누리고 잘 되기 보다, 부어주신 축복을 잘 활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