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

타락한 인간에 대한 비관적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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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가의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만나다

여성 보스의 캐릭터를 앞세운 느와르 영화로서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은 매우 특별하다.

죄에 물든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엄마와 여성이라는 의외의 캐릭터를 통해 실현된다는 점에서 특이한 영화라 할 수 있다.

대중영화들 가운데서 여성이 악마적 이미지로 범죄조직의 보스 역할을 맡은 일은 매우 희귀한 일인 까닭이다.

암흑가 범죄 집단의 암투와 음모 그리고 배신을 그린 ‘느와르 영화’(Film Noir) 는 전통적으로 남성영화로 통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The God Father, 1972) 나 마틴 스콜 세지 감독의 <좋은 친구들> (Goodfellas, 1990) 처럼 이탈리아계 마피아들을 등장시켜서 지하세계를 장악하려는 설정을 가진 할리우드의 느와르 영화들은 양복 입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남자들의 권력 욕구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느와르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쩌면 ‘홍콩 느와르’로 불리는 홍콩범죄영화에 훨씬 더 익숙할 수 있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英雄本色, 1986)으로부터 <무간도> (無間道, 2002)에 이르기까지 홍콩의 어두운 뒷골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홍콩의 느와르 영화들은 한국의 관객들에게 무협영화와 더불어 홍콩영화를 대표할 수 있는 장르로 깊이 각인되었다.

홍콩 느와르 역시 여성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인 반면에 남성의 선 굵은 이미지가 스크린을 압도하는 전형적인 남성영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형 느와르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2) 또한 조폭영화의 변주로 발전한 느와르라기보다 미국이나 홍콩의 느와르 영화들을 한국식으로 변화시킨 장르라 할 수 있다.

<신세계> 역시 최민식과 황정민, 이정재 등의 기라성 같은 남성스타들을 내세워 부조리한 뒷골목 세상을 흥미롭게 드러냈다.

<차이나타운>의 영어제목은 ‘Coinlocker Girl’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보관함 소녀’를 뜻하지만 중국으로부터 불법입국자들을 돕는 한편으로 공권력이 닿지 못하는 무법천지 같은 한국의 그늘진 공간의 의미로서 ‘차이나타운’이란 제목을 쓴 듯하다.

대신 영어제목인 ‘Coinlocker Girl’는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일영(김고은)이 태어나자마자 지하철역 10번 보관함에 버려진 데 따온 이름으로, 일영의 비극적 인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한글제목 ‘차이나타운’과 영어제목 ‘Coinlocker Girl’은 이 영화를 대하는 두 가지의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즉 ‘차이나타운’은 영화배경이 된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김혜수)라 불리는 여성 보스의 어두운 과거와 현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Coinlocker Girl’은 차이나타운의 뉴 페이스로 등장한 일영이 엄마(김혜수)를 닮아가는 어둠의 인생이 녹아 있다.

어둠에 잠식당한 영혼들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김혜수)는 고리대금업자로서 돈을 갚지 않는 채무자에게는 신체포기 각서대로 장기적출도 서슴치 않는 잔혹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어린 아이들은 앵벌이를 시키고 커서는 조직의 일원으로 채무자를 협박해서 돈을 받아 내는 역할을 담당시키면서, 돈버는 데 쓸모없으면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

영화의 중심 갈등을 형성하는 엄마와 일영이의 대결은 채무자의 아들인 석현(박보검)을 만나면서부터 비롯된다.

일생일대의 친절을 경험한 일영은 돈을 받아내거나 아니면 장기적출을 시켜야 할 대상에 대한 뜻모를 애정에 휩쓸리게 된다.

<차이나타운>의 미덕은 타락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죄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다(시 51:3) .

비록 끔찍한 폭력장면들이 나열되고 있지만, 그래도 세상에 아무런 문제도 존재하지 않으며 행복만이 가득하다고 현실을 착각하게 만드는 말랑말랑한 영화보다는 낫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과 세상에 내재해 있는 죄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이다.

죄도 문제도 인식하지 못하니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일도 간구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차이나타운>은 죄가 일으킨 현대인의 비극적 삶의 실체를 드러낸다.

첫째는 이름만 남고 내용은 없는 ‘인간애 실종’이다. 엄마와 식 간의 사랑은 인간애의 기초를 이루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살아가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보관함에 버려진 영아와 그 갓난아기를 키우지만 모성애가 단절된 형식적인 가족을 비춰준다. 그 속에서 엄마는 엄마를 죽였고, 딸은 그 엄마를 죽인다. 엄마(김혜수)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날에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술을 따르며 일영에게 자신이 어머니를 죽인 일을 회고한다.

참회와 변화에 대한 다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영이 끝내 엄마를 죽이고 그것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엄마의 태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사랑마저도 어둠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비춰준다.

엄마를 둘러싼 가족(?)들은 자장면을 시켜서 먹 을 뿐 엄마가 해준 밥을 먹는 장면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사랑 없는 형식적인 엄마의 의미를 전해주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이다.

둘째는 인간의 죄는 인격적인 소통의 단절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드러낸다. 엄마는 명령하고 자식 같은 조직원들은 이에 따를 뿐이다.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튀는 장면이자, 어쩌면 어두운 차이나타운에 잠시 비췄던 한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했던 석현의 등장에 대해서, 엄마는 사랑을 알게 된 일영의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일을 방해하는 처단할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다.

석현은 자신에게 돈을 받으러 온 일영을 집에 들이고 직접 요리한 스파게티를 대접하며 대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인물로 등장한다.

소통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은 잔혹한 범죄조직에서 자라난 일영의 마음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가 일영을 자신의 딸로 호적에 올린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잔혹한 범죄자이지만 엄마에게도 사랑이란 것이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갖고 영화관을 나선다.

이는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 척하는 느와르 영화의 전형적인 상술이다. 진정한 사랑은 인간을 죄로부터 돌아서게 만드는 법이다(롬 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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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구
고신대학교 국제문화선교학부교수. 영화평론가. 이메일 moviejin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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