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어려워질 때 당신은 누구를 의지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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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 후 전화 온 아이가 울먹입니다. 훌쩍이느라 잘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무슨 일로 속상한지 제대로 설명도 못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안쓰러워지지만 그렇게 잠시 통화하고 전화를 끊을 즈음에는 마음이 좀 진정되었는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속상할 수 있지.. 그래도 전화하면 들어주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우리에게도 그런 분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상황이 어려워질 때 나타나는 반응을 보면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가 드러난다. 풍랑이 일어나자 배 위에서 동요하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다. 믿음은 있으되 그것이 상황을 다스리지 못하고 동요를 막을 정도로 크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상황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면에 안정감이 자리 잡으면서 삶에 균형이 생긴다.

막내 정연이가 만 세 살을 지날 무렵, 밤에 자기 전에 떼쓰고 우는 버릇이 있었다. 아내와 함께 아이의 고집을 꺾으려다 급기야 회초리를 들었다. 아이는 울고 버티다가 기력이 다해 쓰러져서 바로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우리 방에서 자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녔다. 아내를 도와서 막내아이를 돌봐주는 현지인 자매가 있었는데 아이가 그 자매의 방으로 가서 자려고 했다. 방의 불을 끄면 울면서 그 방으로 달려갔다. 자매 방에서 잠든 아이를 우리 방으로 데려와서 누이면 자다가 깨서 서럽게 울며 다시 그 방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했다. 자기를 때리지 않고 받아주기만 하는 자매를 피난처로 여겼던 모양이다.

우리 부부는 유대인들이 4세 전에는 매를 대서 아이를 훈육한다는 내용을 접하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순종하는 법을 매로 가르쳤다. 첫째와 둘째는 성품이 유순해서 보통은 매를 들기 전에 꼬리를 내리곤 했다. 그런데 셋째와 넷째는 달랐다. 이전 경험이 새로운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느낄 때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훈육의 기초를 점검해야했다.

막내를 보면서 내가 무언가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함께 무엇이 문제인지를 묻고 구하는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내게 말했다.
“아이를 때리기 전에 먼저 어떤 상황에도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매로 훈육하면 부모에게 두려움을 갖고 부모의 사랑을 오해할 수 있음을 알았어요.”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 하나님께 혼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며 그분과 거리를 두고자 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한 나머지 그분 곁으로 나아가기보단 다른 존재를 통해 대신 안정감을 누리려는 경향이 생긴다.

막내 정연이가 자매 방에서 자려 했던 건 그 자매를 통해 부모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자매는 자기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는 걸 이미 파악했기에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존재 옆에 머물면서 안정감을 느끼려 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이런 전략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첫째, 가정의 가장 높은 권위는 아버지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자매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려고 해도 훈육하고 책임지는 궁극적인 권위는 아버지에게 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안위나 훈육에 대한 문제만큼은 아버지의 권위를 따를 수밖에 없다.

둘째, 아이는 자매와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수 없고, 정해진 기간 동안만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매가 아이에게 잘해주는 이유는 아이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엄마, 아빠 때문에 잘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 후에 우리가 자카르타에서 벗어나 근교 마을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자매는 시골로 가서 일하기는 싫다며 이사 가기 전까지만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언제까지나 아이를 지켜줄 수 없고, 함께할 수 있는 기간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아이에게 ‘사랑하기 때문에 혼내기도 한다’고 말해도 아이가 바로 이해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아이에게 몇 번 말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경험하고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관계 속에서 시간을 두고 서로 이해하게 된다.
<기대>이용규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