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3] 교회의 헌금과 재정 관련하여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 하나 있다

왜 강단에서 헌금봉투를 낭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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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한테 500원을 줄래?
넌 어차피 1000원 내잖아!

‘기도하는 소년’ 그림으로 사생대회 1등을 한 나는 교회에서 (어쩐지) 모범생이 되어 있었다. 주일학교 예배도 항상 일찍 갔고 성가대에도 참여했다(참고로 나는 편도선 수술로 인해 음을 전혀 못잡는 음치였다).

교회는 안다니셨지만 어찌 아셨는지 어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매주 헌금을 하라고 500원씩 주셨는데 나는 그 돈을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하루는 어머니가 헌금 주시는 것을 잊으셨는데 나도 그걸 잊고 교회에 온 일이 있었다. 예배 중 헌금 시간이 돌아왔는데 헌금송을 부르는 중에 그걸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헌금을 내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그 시간이 너무나 민망했다. 가끔 손만 집어넣었다가 빼는 아이들을 보기는 했지만 그건 거짓부렁 아닌가? 교회 모범생인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헌금 바구니는 드디어 성가대석에도 도착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점점 초조함이 커져갔다. 그러던 중 급한 마음에 잔꾀가 번뜩 떠오르는게 아닌가? 내 앞줄 왼쪽에 앉는 부티나는 여자 아이에게 딜을 하기로 했다.

“야, 너 혹시 오늘 500원짜리 두 개야?”
“응. 근데 왜?”
“있잖아. 내가 오늘 헌금을 안가져 왔는데, 넌 어차피 1000원을 낼꺼잖아? 그럼 나한테 500원만 줄래?”

생각할수록 묘안이었다. 너는 어차피 1000원을 내는 것이니 나한테 500원을 주라. 딱히 손해 볼 것이 없는 요청이었기 때문인지 그 아이는 선뜻 나에게 500원을 주었다.

나는 마음을 쓸어내리며 그 아이에게 받은 500원을 당당히(?) 헌금 바구니에 넣었다. 조금 더 나이가 먹어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 나는 교회가 이러한 심리를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모든 예배 시간에 올라오는 각종 헌금 봉투에 쓰인 거룩한 이름들의 시적 향연! 목사님은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건 다 읽으셨다.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일천번제 등 어떤 분들은 이름이 여러번 읽히기도 하였고 이름이 읽히지 않는 분들은 어쩐지 교회에서 뒷방 할망구가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나는 아직도 예배 시간에 헌금 봉투 이름을 읽어 내려가는 행위가 도대체 어떤 성경에서 말하는 근거를 가진 행위인지 이해할 수도 밝혀낼 수도 없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은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한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것이다. 헌금 봉투 종류만큼 그 심리의 종류는 다양한데 한번 정리를 해볼 필요성이 있겠다.

1. 바구니가 오면 남들 시선을 의식하여 헌금하는 가끔 손만 넣었다 빼는 ‘눈치게임 심리’
2.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명제. 별로 기쁨으로 드리지 않는 ‘양심 찌르기 심리’
3. 자식과 가족을 위해 물 떠 놓고 비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소원을 두고 지속적으로 헌금하게 하는 ‘지성이면 감천 심리’
4. 내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겠지?라는 은근한 과시욕으로 목사와 성도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근거가 되는 ‘영역 표시 심리’
5. 내가 낸 여러 가지 항목의 헌금봉투를 붙들고 목사님이 축복 기도를 하면 그 돈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축복을 하셔서 사업이 잘되거나 병이 낫거나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갈 것 같은 ‘거룩한 투자 심리’
6. 주보 뒷면에 구역별로 헌금을 얼마 했는지 써놓음으로써 몇 명이 모이고 얼마를 냈는지를 1타 2피 확인하여 최소한의 헌금액수와 출석자를 확보하는 ‘마지노선 집단 심리’

나는 내가 붙인 이러한 항목들이 고약한 비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헌금 봉투를 읽는 행위가 이러한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한 한국교회 종교 장사의 매우 훌륭한 마케팅 방법론이었다는 것을 요즘은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연지사, 자기 이름이 한번도 읽혀지지 않는 사람들, 가정경제가 파탄난 사람들의 심장에는 다시는 교회에 몸 담고 싶지 않을 상처가 새겨질 것이다.

교회의 헌금과 재정 관련하여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 하나 있다. 나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중학교 때 우리 교회로 전도(인도)해서 열심히 같이 신앙생활을 했었다.

이 친구는 나보다 가정 경제 사정이 훨씬 좋지 않아서 항상 어려움을 겪었지만 공부를 곧잘 해서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진학을 했었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1년인가를 다니고 학비 문제로 더 이상 다니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도무지 방법이 없어 교회에 학비 문제로 문의를 했었지만 결국 별 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친구는 아직도 졸업을 못한 대학교 중퇴 처지다.

반면 나는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고 그것으로 우리 어머니는 경제적인 부담을 많이 덜어내실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면 참 민망하고 가슴이 아프다.  당시에 그런 사실들을 전혀 감각하지 못할만큼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것이 참 속상하다.

그런 마음의 부담 때문인지, 나는 생활비 이상의 목돈이 생기면 자꾸만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리고 자꾸만 교회나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생기면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

참 다행인 것은 내가 나를 위해 바치고, 남들 눈치보며 바치던 종교적 ‘헌금’이 아닌, 진짜 어렵고 힘든 사람들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온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좀 더 확장해본다면 교회의 헌금은 최소한의 교회 운영을 제외한 비용은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돈이 넘치면 타락한다. 그것은 어떤 누군가에게도 예외 없는 일이다.

담임목사님(김관성)께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돕는다는 것은 내 삶이 흔들리고 휘청거리는 것을 감수할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