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5] ‘예수님, 참 억울하셨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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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꾸 옛 생각에 잠깁니다). ‘국딩’시절, 음악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잘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리코더’라는 악기로 연주하는 시간이었어요.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다 같이 합주를 하다가 한 녀석이 삐익~ 소리를 냈습니다.

선생님이 멈칫하셨지만 이내 다시 연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요. 잠시 후 다시 한 번 삐익~ 소리가 나는 거 아닙니까. 더 큰소리로요. 선생님께서 연주를 멈추더니 경고를 한번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작정을 했는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아주 큰소리로 삐이익!!! 삑사리를 내었습니다.

한 반에 거의 50~60명 정도까지 수용(?)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장난이었습니다. 소리만 들었지 누가 그랬는지는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그거 아십니까. 이제 선을 넘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찾아옵니다. 보통은 이런 감각이 현저히 떨어지는 애들이 맞는 거지요.

예상대로 선생님은 일어나셔서 양 허리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이제 음악 수업은 끝났다. 너희들도 끝났다’라는 무서운 표정으로 나직이 말씀하십니다.

누구야, 앞으로 나와

그런데 말이죠. 이 녀석이 나오질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모두 눈을 감게 하고 ‘범인’에게 손을 들라고 하셨지만 역시나 범인은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리코더 실수는 온데 간데 없고, 쌤의 권위에 도전한 이 범인(?)녀석의 맹랑함이 20대 후반의 혈기왕성한 담임 쌤을 폭발시켜버렸습니다.

이분, 정말 열 받으셨는지 다음시간인 체육시간을 간단히 제껴 버리시더니, 모두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여기 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선생님은 몇 차례 눈을 감기고 자수의 기회를 주셨지만 역시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학교에는 저희만 남았습니다. 긴장감과 울음소리가 나직이 감도는 교실. 저는 아직도 해가 지는 그날의 노을이 살짝 기억이 납니다.

급기야 선생님은 저희 모두를 책상 밑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십니다.

“마지막 기회다. 범인은 종이에 자기 이름을 적고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적어내라.”

다행히 범인이 자수를 했나 봅니다. 길었던 공포의 시간이 끝나고 모두들 아픈 다리를 절뚝이며 집에 돌아갔습니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습니다. 선생님이 리코더 범인에게 반성문을 요구했지만 이틀 동안 반응이 없었던 것입니다.

범인은 진짜 강적이더군요. 머리끝까지 열받은 선생님은 엉뚱하게도 부반장을 일으키시더니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반장 직위를 박탈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수업에서 핀잔과 쿠사리를 주시는 게 아닙니까.

영문도 모르는 부반장. 맙소사! 이 녀석만 유일하게 종이에 이름을 적어내었던 것입니다. 수업이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 친구는 급기야 참았던 눈물을 터뜨립니다.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고 울먹거리더니 이내 서러워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선생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진상을 설명했습니다. 얘는 범인이 아니라고요.

선생님이 부반장을 부르셨습니다. 알고 보니 이 녀석, 아이들이 너무나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자기 이름을 적어냈던 겁니다.

선생님은 당연히 범인을 알고 계셨을 꺼라고 생각했답니다.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급기야 이 녀석을 부둥켜안고 미안하다고 몇 번을 사과하시며 훨씬 더 서럽게 우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친구의 부반장 직위가 복권되었구요. 선생님의 무한칭찬과 아이들의 박수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아이콘이 된 것이지요. 후에 ‘착한 어린이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엉뚱하지만 친구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부반장 덕분에 이 사건이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물론 진범은 못잡았습니다.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책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한 아이의 잘못에 연대책임을 지우는 교육방식에도 약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름을 써낸 부반장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누군가 희생해야 이 사건이 해결될 것임을 그 아이는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 이 사건을 통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희생과 대속적 죽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되었는데 ‘예수님, 참 억울하셨겠네요’하고 기도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저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의 희생이 은혜로만 받을 내용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요. 복음을 드러내고 예수의 제자로 사는 인생, 생각보다 훨씬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많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이 많고요, 마치 이 엉뚱한 희생을 치른 부반장처럼 무모하고 바보같은 짓을 감수해야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의 은총은 말할 수 없는 죄를 속함 받은 은혜의식을 불러 일으킵니다. 한평생을 예수 십자가에 새겨진 희생 기억하며 은혜로 감사함으로 사는 복음의 빚진 자가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이 복음의 가치는 믿음의 분량만큼 책임의식으로 드러날 때 빛이 납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더라도 이 복음의 진정한 은혜를 경험한 자에게는 빚진 자의 책임의식이 깃들게 됩니다. 교회 안팎의 이웃, 소외되고 억눌린 자, 고아와 과부들, 무너진 정의와 구조악에 대한 책임으로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이거나 확장된 영역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암담합니다. 안타깝지만 교회와 우리들, 예수님의 희생정신보다 고작 ‘나는 떳떳하다’는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안달일 때가 많지 않나요. 빚진 자의 책임의식보다는 자기 인생을 안전하게 지키고,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은혜를 동원할 때가 훨씬 많지 않냐는 겁니다.

요즘 누가 교회에 손해 보러 갑니까

신앙에 있어서 올바른 책임의식이 무너질 때,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식은 매우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됩니다. 책임이라는 말이 무거운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감당하려 들지 않습니다. 요즘 교회, ‘개독교’ 소리 듣고 있으니 구실 좋잖습니까. 요즘 누가 교회에 손해 보러 갑니까.

물론 각자도생, 살아가기 버거운 인생입니다. 자기 희생보다는 먹고 살기 바쁩니다. 강퍅하고 냉정하며 그나마 손에 쥔 것이라도 지켜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과도한 희생과 헌신으로 그렇게 서로를 책임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부둥켜 안고 있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의 복음의 본질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며 교회의 놀라운 위엄과 권세가 드러난다는 사실을요.

무모하고 바보같은, 그리고 계산을 튕기지 않고 손해 보기로 결정한 작은 아이의 희생 앞에 한 없이 부끄러운 오늘입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아주 조금만 억울해도 쌍심지를 켜는 제 모습이 한심하고 민망합니다. 게다가 뻔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보면서도 ‘나도 어려워’하고 외면하는 제 양심이 매우 화끈거리네요.

제가 단순해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책임의식을 가진다는 거, 제 주머니를 털어내는 것 외에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감리교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주머니의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믿을 수 없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 붙들고 예수님 처음 믿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엉뚱한 에피소드를 일으키던 부반장 시절이 많이 그립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