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6] 내가 겪었던 딜레마는 ‘한방 크게’ 은혜를 받고 돌아와 다시 죄로 다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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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나~ 주님. 저 이제 죄 안 짓고
오로지 말씀대로만 살라요! 두고 보십시오

나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결연한 의지를 담아보면 저런 뉘앙스였던 것 같다. 각종 수련회, 부흥회,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한 번 씩 시즌이 돌아오거나 영적 고갈이 찾아 왔을 때 다시금 불을 붙이며 은혜를 구한다. 그러고 나면 결국 저런 고백으로 결론을 내리고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비장한 각오로.

바야흐로 행사의 계절이다.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며 집회를 여는 교회나 단체들이 많이 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교회의 심각한 영적 위기 가운데 더욱 함께 모이고 기도하고 애써야 함은 당연하다. 각종 집회와 행사 가운데 헌신과 수고를 드리시는 목사님, 사역자, 교사들이 너무나 귀하다.

비교적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던 나는 교회의 다양한 집회들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일찍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 가운데 살아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겪었던 큰 딜레마는 ‘한방 크게’ 은혜를 받아 놓고 돌아와서 ‘한방 크게’ 죄를 지음으로 다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수련회를 다녀오면 몰라보게 달라진 나의 모습이 시작된다. 엄마에게 친절하고 동생에게 한없이 헌신적인 형의 모습이 나타난다. 말씀이 콕콕 맴 속에 박혀서 조금만 묵상해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은혜의 향내가 온몸에서 진동한다.

‘캬. 이번에는 성공이구나! 이번에 받은 은혜는 진짜인가 봐’ 하는 것도 잠시였다. 내 경험으로는 거의 이틀 정도 자고 나면 서서히 그 약효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슬슬 엄마의 잔소리가 짜증 나며, 은혜로 무력해진 나를 건드리는 동생을 한 대 쥐어패고 싶다. 참는다. 또 참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폭발한다.

“에이 씨~ 내가 진짜 웬만하면 은혜롭게 살려고 하는데 왜 건드려!!!!”

뭐, 저 비슷한 패턴을 한 20번쯤 겪고 나니 집회에 가서도 이제는 함부로 은혜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어찌 보면 내가 ‘이번에는 진짜 변해야지’하며 평생을 살다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애(?)가 아닐까 할 정도로 ‘나’라는 놈은 지독한 놈이 분명하다.

사실 이 정도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우리에게는 크나큰 열정이 있다. 그래서 더 강력하고 빼도 박도 못 하는 처방을 내린다. 평범한 나의 교회를 벗어나 유명한 훈련 프로그램에 뛰어들거나 집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도 잠시다. 속세(?)를 떠나 소위 더 쎈 훈련을 받을수록 괴리만 더 커질 뿐이다. 그렇다. 뭔 짓을 하든 간에 우리의 삶의 자리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경험은 아닐 듯싶다.

어쩌면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걸까. 예수 믿고 변화되어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한 사람이 정말로 성화 되고 주를 닮는 일이 일어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예배 한 번, 기도 한 번, 집회 한 번이랴.

슈퍼파월~ 바울이
보여준 자기 고백

예수를 믿고 난 후의 우리의 존재론적 변화는 실제로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그지 같은 모양대로 살아간다는 것에 있어서 사실 반박의 여지도 없다. 나보다 오래 평생 교회를 섬기신 분들에게 이 고백은 더 실감 나게 나오리라 확신한다.

물론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인간상이 매우 처참하며 특별히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내내 실패만 거듭하는 것이 우리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신약 성서의 절반을 써낸 사도 바울. 어느 통계에 보니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성경 인물이 바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슈퍼파월 바울이 보여주는 자기고백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고백을 익히 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b)

바울의 이 고백이 나온 시점이 예수님을 핍박하던 시절이 아니라 오히려 사역의 중 후반기인 점을 주목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죄에 대해, 자기의 철저한 무력함에 대해, 자기의 비참한 실존에 대해 더 깊이 깨달아 갔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겸손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아주 실질적인 자기 인식이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주를 위한 헌신과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 늘어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아주 쓸모없는 자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에 딱 좋은 도구라는 점이다.

내가 많이 아는 것 같거나, 내가 이쯤 헌신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 같거나, 누군가를 지도할만한 자격이 있는 것 같거나, 다른 사람과는 조금 차별화된 영적 은사가 있어 어깨 뽕이 올라가 있거나… 등등. 이런 건 대부분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매우 부족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자기 인식이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는 바울이 15절 앞부분에 하는 말을 마저 묵상해본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그렇다. 이 사실이 정말 크다. 백번 천번도 더 들은 말이지만 익히 알고 또 듣고 또 말해도 좋은 이 소식. 내가 죄인인 것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이 복된 소식이 머리와 지식을 넘어 울컥 목구멍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앉는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오직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뛰는 것 같다. 그리고 깊은 탄식과 함께 온 존재를 휘감는다. 그래 이것뿐이다.

어릴 적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깨닫고, 만약에 내가 목사가 된다면 할 얘기는 이것 뿐, 다른 것이 없을 텐데 평생을 어떻게 우려먹나 고민했던 적이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평생을 다해 이것만 선포하고 고백하고 외쳐대도 모자랄 만큼 이 복음이 전부다.

요즘 들어 무척 그지 같은 내 실존. 이 고백이 잦아진다.

‘아이고 주여, 이 죄인 죽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