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교생활’ 이야기 #8]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은 정말 신앙의 덕이 되지 않는 것일까

믿음에 지성이 꼭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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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휴 기간에 있던 일입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할 일이 있었는데요, 뒷좌석에 앉아 계신 한 아저씨의 흥미로운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엿들은 것이 아니고 워낙 큰 소리로 말씀하셔서요.

내용을 요약하면 ‘제사 드리는 것도 죄고, 제사 음식을 차리는 것도 죄가 되고, 귀신이 오기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만 해도 죄를 짓는 것이다. 죄가 쌓이면 천국 못 간다. 집에 안 내려간다고 욕먹으면 그게 천국에 상급이 되니 내려가지 마라’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 이것 참 이분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집사님’을 연발하시고 출석 교회와 목사님의 이름을 자꾸 얘기하시는데 제가 아는 유명한 교회이지 뭡니까. 듣다보니 사역자이신 것도 같고, 교회의 중직이신 것 같은데 지금 저 내용이 대체 몇 가지의 사상이 짬뽕된 내용인지 아실까 모르겠습니다(저 내용을 분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주목했던 내용은 아저씨의 ‘확신에 찬 목소리’였습니다. 정말 자신 있고 분명하게 큰소리로 말씀을 하셔서 너무나도 확실한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는 셀프 감탄의 뉘앙스마저 풍기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당장에라도 천국에 올라가실 것만 같은 믿음의 의인이셨습니다. 그러나 불신자 가족들을 섬기고, 자기희생을 해가며 복음 전할 기회를 엿보는 애타는 신자의 마음을 이해할 리 없으리라 봅니다.

보통 ‘책 한 권 읽고 사람 잡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진하게 신앙체험을 하고 확신을 얻은 분들 중에도 사람 잡는 분들이 많습니다. 확신의 근거가 개인적인 신앙체험에 있고, 주장하는 내용도 대부분 자기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분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반지성주의적 성향’이라는 겁니다. 자기 신앙체험을 가지고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그걸로 검증되지도 않은 지식을 용기 있게 남발하며 좀 더 크고 깊은 차원의 지식은 몽땅 무시해버리는 거지요. ‘우리 믿음에 더 이상의 지성은 필요없다!’라는 선언입니다.

안타깝지만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부정적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이 ‘반지성주의’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믿음의 내용과 진리의 구체적인 지식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고백하는 교리와 세계관은 한 치의 오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되니까요.

마치 지성적 성찰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는 큰 도움이 안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우리의 생을 주도하는 것은 생각보다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신앙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등장했던 이단들이 잘 사용했던 방법을 보십시오. 정통을 무시하기 위해 지성을 배제시켜버리고 영성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때 강력한 지성을 사용하여 참된 기독교를 변증하는 피터지는 싸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과 그 내용은 지켜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안에 보여지는 다양한 형태의 신앙에 대해 듣다보면 ‘정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살짝 겁이 납니다. 반지성주의의 보호 아래 샤머니즘적 기독교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말이지요.

게다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명쾌한 논리를 기초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보다, 단순히 윤리적이고 율법적 차원의 ‘종교생활’만을 가르치고 있다보니, 주일성수, 십일조, 주초금지, 제사금지와 같은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명제가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 부흥이 비결이 뭔지 아시죠. 겁을 주거나 상을 주는 것이거든요. 성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단순하지만 이러한 상과 공포의 틀을 가지고 종교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사고하는 순간 이미 만들어놓은 교회 왕국의 아성이 무너질 것이 뻔 한데 이것을 버릴 리가 없습니다.

편안한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살짝 한쪽 귀를 닫고 한쪽 눈을 감으면 됩니다. ‘그런 건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은 참 신앙의 덕이 아니야’하고요.

우리가 그러는 동안 이미 교회는 극단적인 치우침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교회의 반지성주의가 한국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많은데요, 주일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는 떼어놓고 들어가는 그림 보셨나요. 딱 그 꼴입니다.

반론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며 의심과 갈등이 없는 맹목적 신앙 가운데 무엇이 양산되었습니까. 상식이 없는 기독교가 양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삶과 신앙을 분리시켜버린 연후에 성공주의와 맘모니즘의 바퀴를 달아버린 것이지요. 이걸 어떻게 멈춰야 할까요.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무신론자이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뼈아픈 충고를 들어봅니다.

“종교가 미치는 진정한 나쁜 영향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네 맞습니다. 몰이해가 군중 전체에게 전염되었을 때 나타나는 무서운 현상이 십자군 전쟁이나 나치즘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회의하며, 의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자리에는 무서운 종교적 맹신과 혐오의 정서가 자라납니다.

깊은 생각 없이 제목만 보고 ‘아 그건 이게 답이지’, ‘아 그건 죄야, 극혐이야.’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고집과 독선을 신앙이라고 착각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부분을 한번 생각해 볼까요. 아주 보편적인 성경 교리와 신앙고백이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러 있다가 좀 더 광활하고 감당이 안되는 지적세계를 맞이했을 때 어떻습니까. 상당한 위협을 느낍니다.

또는 내 신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몇 가지 알고 있는 성경구절과 교리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거,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이내 우리는 신앙에 대한 도전과 의심 앞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인생 가운데 반드시 이런 지점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적이고 영적인 확신에 차서 으스대고 있을 때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굴리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내가 믿음으로 고백했던 자기 체험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무지한 과정을 통해서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저 탄복하고 무릎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쓰시는 귀한 재료들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회의감, 좌절감, 의심의 마음, 알 수 없는 원망,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의 이유를 찾는 지성적 성찰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회의하는 용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에 확실하고 충분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자기가 왜 믿는지 전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믿을 이유’가 없다면 ‘회의하지 않을 이유’도 당연히 없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허점이 드러나고 그럴듯한 학문적 근거와 막강한 정서적 위험을 동반한 회의가 몰려들면 그 회의를 반박하기 힘들다. 회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왜 믿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과 분투, 회의하는 것 없이 ‘믿을 이유’가 분명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성적 성찰의 분량이나 깊이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 믿을 이유를 찾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단순히 책 많이 읽고 공부하자는 지식주의를 말함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의심하는 ‘건강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삶의 난제와 지적 도전 가운데에서 ‘회의’하지 않으려고 머리와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또는 섣부른 답을 찾아내어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도리어 끊임없는 회의 가운데 우리의 믿음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지성적 성찰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게으름뱅이를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지적인 면에서 게으른 사람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C.S 루이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