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토크 #04] 난 신을 안 믿는 것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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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하나님이 없다며 무시하고 사는 사람 중에 이론적인 무신론자는 거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애써 하나님이 없다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대충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의 모든 언행에서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처럼 산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실제적인 무신론자’라고 한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두지만 실제 삶에서는 전혀 인정치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차라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론적인 의문이나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론적으로 정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정말 있는지를 탐구해가는 사람은 반드시 무신론에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은 때로 없는 분처럼, 멀리 계시거나 숨어 있는 분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들 역시 죄악의 본성에 연약한 자들로서 자신들의 제한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뜻을 더 우선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 역시 때로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하나님 부재의식으로 슬픔과 고통을 호소하지만,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그 하나님이 없다는 의식으로 인해 악을 행하기에 더 자유롭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시편 10편 2-4절에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2-4)

4절 말씀은 시편 14편 1절을 그대로 반복해놓은 말씀으로 보인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이 말씀을 보면 결국 사람들이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하나님이 없는’ 것과 ‘하나님이 없다 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다. 악인들은 자신이 악을 행하고 쾌락을 일삼으며 마음대로 살려면 “하나님이 없다 해야” 한다. 실제로 하나님이 계셔도 하나님이 없다고 치부하고 살아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느냐고 물어보면 현대인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역시 실은 엄격한 무신론자라기보다 불가지론자에 가깝다. 그것이 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 가장 쉬운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이런 어중간한 입장을 갖게 되면 삶에서는 하나님을 전혀 인정치 않고 무시하고 살아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해진다.

“나는 신을 안 믿는 것은 아냐. 그러나 그 신이 내 삶을 제약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싫어!” 이런 생각이 대다수 현대인의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식의 불가지론이야말로 철저한 무신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가치관이다. 차라리 이론적으로 정말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정직하게 의문을 갖고 공격적으로 도전하면서 한번 따져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솔직하고 희망이 있다.

물론 마음 깊은 데서는 끊임없이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딱히 어찌할 바를 몰라 계속 어둠 가운데서 영혼의 방황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런 부분에 대한 정직한 질문을 외면하고 그저 편한 대로 불가지론에 머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들 각자의 삶마저 불가지론에 기대어 그것을 자신들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기준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문제가 심각한 채로 계속 남는 것이다.

불가지론자로 산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신론 못지않게 불가지론 역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과 철학자들, 예술가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죽음의 의미도 끝내 가르쳐주지 않고, 따라서 그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해주지도 못한다. 죽음은 훗날 불가지론자에게도 반드시 현실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나를 만들었다고 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잘 모르겠고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지도 않다”라는 불가지론만 붙잡고 살아갈 순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답을 제대로 붙잡고 사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주 위험천만한 도박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는 무책임한 삶의 자세일 뿐이다.

보통 신의 존재를 만나는 통로를 종교라고 생각한다. 신을 만나는 문제를 상식적으로는 어떤 종교를 만나느냐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서 사람의 몸을 빈틈없이 정교하게 만들 만큼 인격적이고도 전능하며, 또 각 사람의 죄를 심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느냐고 할 때 그 범위가 아주 많이 좁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주에 속한 내 몸이 정교하게 지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실제로 분명히 보고 느낄 수 있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그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기독교인은 그 창조주 하나님은 기독교에 계시고 성경을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아주 독단적이고 배타적이며 교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조건 독단적이라고만 하기 전에 진리란 정말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를 객관적으로 한번 돌아본다면 이런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통 다 인정하듯이, 참종교가 되려면 진리를 소유해야 한다. 그런데 여러 종교의 주장을 들어보면 신관이나 구원관에서 서로 명백하게 상충한다. 이렇게 되면 과연 어떤 종교가 참으로 진리를 소유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분별하려면 먼저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진리는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진리는 어떤 명제(무엇은 무엇이다)가 실재(reality), 곧 실제 세계와 일치한다. 예를 들면, “1 더하기 1은 2다”라든가 “3 곱하기 3은 9다”와 같은 진술은 확실한 진리이다. 이 수학적 진리는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달나라에서도 진실이다. 또한 “일본은 섬나라다”라는 명제도 진리이다.

실제 세계의 그러함에 거짓 없이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진술이나 주장이 실제 세계의 그러함과 일치할 때 그것을 진리라고 말한다. 아무리 그럴듯하고 멋있어 보여도 그것이 실제 세계에 부합되거나 일치되지 않으면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진리의 문제는 어떤 타입의 정치인을 더 좋아하느냐와 같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성향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답이 정답이냐의 문제이다. 실제 세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진술이나 주장이 있지만, 그 명제들 중에서 실제로 이 세계의 구조나 운행의 이치와 일치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봐야 한다.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반대되는 두 가지 진술이 존재할 때 두 진술이 다 옳을 수는 없다. 이런 경우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이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진리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특성이 있으므로 그 자체로 배타성을 가진다.

이러한 진리의 특성에 비추어, 세계의 각 종교가 모두 다 자신의 종교가 진리이고 자신들이 믿는 신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각 종교가 믿는 신들의 존재에 관해 살펴보고자 할 때도 과연 그 신들이 창조주 하나님일 수 있는가를 이러한 진리의 정의에 입각해서 돌아보아야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진리에 대한 정의를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도 정확히 적용해볼 수 있어야 한다. “우주에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라는 말이 진리가 되려면 그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이 이렇게 정교한 몸과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를 창조하실 정도의 놀라운 지성과 함께 엄청나게 구체적인 능력을 실제로 가진 인격적인 존재여야 할 것이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의 구성 요소인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를 실제로 창조한 존재인 만큼 적어도 시공간의 역사성 속에서 그분의 흔적과 존재 증거들을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창조주 신은 그 정도의 요건은 갖춰야 한다는 게 실제 세계를 합당하게 해석해주는 진리에 부합된다.

따라서 어느 특정 종교가 믿는 신이 정말 실제로 우주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이 되려면, 그 신은 적어도 인격성을 가진 무한한 지성과 능력을 갖춘 존재로서 역사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우리가 지금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정교하고 놀라운 질서와 체계를 갖춘 창조 세계를 만들어낼 만한 지성과 감정, 의지를 지닌 인격적 존재여야 하고, 역사성을 통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

사실 창조주 신이 있다면 그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곧 그의 주소지를 정확히 찾고 가려내는 문제는 우리 각자의 영혼 구원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너무도 중차대한 문제이다. 평생 어떤 종교를 진실하게 열심을 다해 믿었다 해도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애초부터 그 종교의 주소지가 참된 신이 존재하는 곳으로 참된 구원을 제공해주는 곳이 아니라면 그 진심과 열심은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하나님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는 그 하나님이 어디에 존재하고 사람은 어디서 그를 만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와도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각 종교가 믿는 신이 곧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는 것은 한번은 정확히 점검해볼 일이다. 만약 각 종교가 주장하는 신에 대한 믿음과 가르침이 “창조주 하나님은 이런 존재여야 한다”라는 것과 관련해서 실제 세계의 그러함에 맞지 않는다면 그 종교에서 믿는 신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자면 그 신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