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질문했다. 예수 믿지 않으며 부자로 사는것과 예수님 믿으며 좁은 집에서 사는것.. 어떤것을 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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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다보면 멋진 외모에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생활에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분들을 보다보면 지금 내가 있는 공간과 상황이 마음을 어렵게 합니다. 부자이면서 믿음을 좋은수도 있고 가난하면서 예수님 없는 삶을 살수도 있겠죠? 

그러나 질문앞에 나의 솔직한 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느 것이 더 우선순위인지.. 세상의 맛을 보아 알게되고 나서 더 그 맛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열매를 맛보아 그 맛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생의 염려, 재물, 향락pleasures of life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가복음에서는 세상의 염려the cares of the world, 재물의 유혹the deceitfulness of riches, 기타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재물의 유혹(혹은 속임)과 향락(생활의 기쁨)이다.
가시떨기thorns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_눅 8:14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_막 4:18,19

열매로 가야 할 영양분을 가시에 빼앗기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가시를 낸다. 그런데 그 가시가 우리를 아프게 찌른다기보다 우리에게 익숙하여 어쩌면 열매 같은 느낌을 주는 것들이다.

<미운 우리 새끼>라는 TV프로그램에 연예인으로,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여 넓고 좋은 집에 사는 한 사람이 나왔다. 그런데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집이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좋은 집에 살고 싶었다고 했다. 열심히 노력하여 결국 그 꿈을 이루었지만 혼자서 큰 집에 사는 것은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살아야 비로소 집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족이 있어도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열매, 즉 알맹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 역시 껍데기가 아닐까?’라고 목사로서 생각했다.

젊은 청년들에게 강의할 때 이 이야기를 나누며 물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넓은 집에서 아무 문제 없이 편하게 사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가족과 좁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 중에 어떤 것을 원합니까?”

순간 청년들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나는 그들의 답변을 정확히 듣지 않았다. 이상한 대답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재물이 주는 확실한 메시지가 있다. 예수님은 그것이 ‘속임’ deceitfulness이라고 말씀하신다. 재물은 넓은 집에서 살고, 좋은 가구를 들이고, 아이들의 장난감 방이 따로 있고, 좋은 교육을 시키고,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여행 다니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 삶에 가장 강력한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 신앙도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쪽으로 믿고 나아간다면, 그것이 그의 삶의 열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재물이 가능하게 해주는 메시지를 적극 받아들이고, 삶의 모든 방면(교회와 신앙을 포함한)에서 재물을 추구한다면 가시를 맺은 것인가 아니면 열매를 맺은 것인가?
책상과 옷장, 신발장을 열어보면 자기에게 작은 사치와 기쁨을 주었던 것들을 금방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런 마음으로 내 기쁨을 위해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하게 가시인지 열매인지 그 결과를 놓고 생각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가시, 즉 내 욕심에 흡족한 내 기쁨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있는가?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가난한 날에 아내가 만들어주던 라볶이는 우리 집 최고의 요리였다. 그러다 아이들이 크면서 피자를 사 먹게 되었다. 수원 율전동 반지하에 살 때 아내가 피자를 만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도우만 겨우 먹고 나머지는 버리면서 다시는 집에서 피자를 만들어 먹을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아내는 입맛에 맞는 피자를 만나면, 아주 크지 않은 크기라면 한 판도 먹었다. 아이들도 피자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피자를 멀리까지 가서 사왔다. 매장에 가서 받아오면 30퍼센트 할인을 받을 수 있기에. 버스를 타면 할인을 받는 목적이 상쇄되기 때문에 걸어갔다. 신상 피자가 아닌 기본 피자를 사왔다. 아주 맛있었다. 가족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재정으로 행복했다.

어느 순간, 재정이 풍족할 때가 있었다. 그때도 피자를 사 먹었다. 버스를 타고 가서 사왔다. 신상 피자, 비싼 피자를 사와서 가족 모두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은혜보다 돈을 쓰는 맛이 더 컸다.
돈을 써서 더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음을 느끼고야 말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비싼 피자를 사줄 수 있는 아빠가 되었고, 아이들은 토요일에 아빠가 사온 비싼 피자를 별 생각 없이 먹었다. 그것이 우리가 토요일을 즐기는 방식이 되었다.

토요일 아침, 가족이 함께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내가 만들어주는 라볶이를 기다리던 즐거움이 사라졌다. 돈이 그것을 앗아가버렸다. 라볶이가 예전만큼 맛있지 않았다.
‘아휴, 심각하구나. 돈이 우리를, 우리의 토요일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비량으로 사는 삶이라는 점이다. 다시 재정이 어려워져서 함부로 피자를 사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피자가 집에서 사라지자 가끔 저렴한 동네 피자를 사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2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치킨과 피자를 사왔다. 기본 피자지만 맛있었다. 돈을 쓴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겨우 피자를 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피자를 먹으며 따뜻함을 느꼈다. 피자를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를 느끼며 행복할 때도 있고, 돈을 쓰는 맛을 느낄 때도 있었다.
<시험을 당하거든> 김길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