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로 잉태된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장자로 태어나기 위해 다퉜다.

유대인들에게 장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특별한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야곱은 이 경쟁에서 간발의 차이로 밀렸다. 이삭의 차남으로 태어난 야곱이 자라면서 가장 부러워한 것은 아쉽게 놓친 장자의 권리였다. 장자로서 아버지의 축복과 유업을 이어가는 이 권리를 얻는 데 모태에서는 뒷심이 부족해 밀렸지만, 그것을 만회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비의 유업을 이어받는 첫 번째 비결은 그것을 사모함에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유업 잇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소망하지 않는데 유업을 이어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영적인 유업을 물려받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누군가의 유업을 사모해야 한다. 당신을 이끌어주는 분의 영성을 존경하고 사모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맏아들 에서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다. 반면 야곱은, 성격은 좀 음흉해도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었다. 에서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기 위해 아비의 축복을 받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야곱을 지지했던 리브가가 옳았고, 이삭은 리브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아비가 분별력이 없으면 가정에 불행이 온다.

어느 날 야곱에게 기회가 왔다. 사냥을 마치고 허기져 돌아온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산 것이다! 권리를 합법적으로 샀으니, 이제 장자로서 아버지의 축복만 받으면 된다. 여기에 어머니 리브가가 도움을 준다. 리브가와 야곱이 합심하여 이삭과 에서를 속인다. 에서가 없는 틈을 타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이삭에게 야곱을 들여보내고, 야곱은 자신을 에서라고 속여 장자에게 돌아가야 할 아비의 축복을 가로챈다. 당연히 이 사건으로 야곱은 에서의 진노를 사고, 그를 피해 결국 하란으로 도망하기에 이른다(창 27:41-45).

야곱은 그렇게 집에서 쫓겨났다.

그렇게도 아버지의 유업을 잇고 싶어 했던 야곱이, 유업을 잇는 것은 고사하고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먼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다니! 당시 여행은 오늘날과는 달랐다. 친족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위험한 모험이었듯이,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하란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위험한 모험이었다.

‘과연 오늘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을까? 사나운 짐승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도적을 만나면?’

더 우울한 것은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하란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괜히 축복에 욕심냈다가 이게 무슨 꼴이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지만, 야곱의 인생은 한마디로 험악했다!(창 47:9) 그 험악한 인생의 서막이 이제 오르고 있는 것이다. 아비의 유업을 열망했던 야곱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유업을 잇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열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업을 잇는 것은 팥죽으로 권리를 사거나 속여서 아비의 축복을 강탈하는 인간의 방법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리브가와 야곱이
급하다고 자기 생각대로 해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삼 대째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복된 유업이 곧 나의 신앙을 보증해주지는 않았다. 나의 데스티니는 열아홉 살 겨울에 하나님을 만나면서부터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의 신앙은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였다. 크리스천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고, 그렇다고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하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 애매한 상태는 많은 모태 신앙들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분명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유업이 있음에도, 뭔가 갸우뚱하게 하는 것이 있다. 야곱도 그랬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 날도 야곱은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노숙을 했다.

광야에서 해가 떨어지면 길에서 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적당한 돌을 하나 골라 베개 삼아 잠을 청했다. 그곳은 훗날 “벧엘”이라 불리게 되는, 야곱의 데스티니에 있어 운명의 장소였다. 그 밤, 야곱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비참한 노숙자 야곱에게 하늘이 열린다! 열린 하늘을 통해 천사들이 왕래하고, 하나님께서 강림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는 열망, 하나님의 유업을 잇기 원하는 그의 영적인 열망을 보시고 야곱을 찾아오신 것이다. 험악한 인생을 헤쳐 가던 야곱에게 하늘이 열렸으니, 이것이 곧 벧엘 사건이다, 그렇다! 영적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벧엘’이 있다! 유업을 잇기 원한다고? 그렇다면 영적인 열망이 있는가? 이 열망이 당신을 벧엘로 인도할 것이다.

벧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데스티니를 계시하시고, 그것을 이루어가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시는 곳이다. 그 날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은 예전에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이었다.

“너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다. 네 자손들은 동과 서와 남과 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너와 네 자손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이 야곱에게 다시 주어졌다. 드디어 야곱이 그렇게도 원하고 원했던 자신의 데스티니, 아비의 유업을 계승하는 데스티니가 확정된 것이다.

아비의 유업을 잇는 야곱의 데스티니는 팥죽으로 권리를 산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아비의 축복을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분들의 축복기도를 많이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유업을 이어가는 데스티니는 하나님을 만나는 벧엘이 있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아비와 맺었던 언약을 나와도 맺으실 때, 비로소 시작된다. 더 이상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실 때, 아비의 데스티니가 아닌 내 데스티니가 시작되는 것이다. 유업을 이어가야 할 우리에게는 벧엘이 필요하다. 

† 말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 잠언 8장 17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 이사야 55장 6절

† 기도
하나님, 부모님의 하나님, 목사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십시오. 야곱처럼 저도 벧엘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데스티니를 주시고 언약을 맺으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옵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은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아니면 애매한 상태에 있습니까? 크리스천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한 믿음이 없고, 그렇다고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하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은…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데스티니는 하나님을 만날 때 펼쳐집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만난 하나님, 그 자리에 내가 있기를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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