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이 아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의 모든 능력이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느 책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많은 생각에 빠졌던 적이 있는데, 《흔들리는 마흔, 붙잡아주는 화두》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불교의 화두를 현대적 언어로 풀어 쓴 책이다. 책에 수록된 내용 일부를 인용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했다.

한 수행자가 노 선사에게 물었다.
“절벽에 매달려 있지만 곧 떨어질 듯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손을 놓게.”
다른 수행자도 물었다.
“벼랑 끝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중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한 걸음 내딛게.”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라는 이야기 아닌가?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는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언론인 출신의 저자는 불교의 화두를 소개하면서 “날마다 펼쳐지는 일상 속에서 작게라도 죽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끌어낸다. 불교의 화두를 현대적 언어로 풀어낸 책이다.

나는 이 소개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일상 속에서 작게라도 죽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 아닌가? 나도 사무실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액자를 걸어놓고 매일 ‘맞아. 내가 날마다 죽어야 해. 작게라도 죽는 연습을 해야 해’라고 다짐하곤 한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불교에서도 벼랑 끝에 매달려 버둥거리지 말고 손을 놓고 떨어져 죽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것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모든 종교의 목표가 같구나.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날마다 죽는 것이구나. 양보하고 희생하고 포기하고 욕심내지 말고 날마다 죽으라는 것이구나.’

문제는 무엇인가? 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 신자도 잘 안 죽는다. 기독교 신자도 잘 안 죽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었다.

그런데 기독교와 불교가 ‘날마다 죽노라’라는 공통된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불교는 스스로의 고행과 수행 같은 자기 몸부림을 통해 득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날마다 죽기 위해서 추구하는 방식은 바로 이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

우리의 고행으로는 안 된다. 우리의 노력만으론 안 된다.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은혜로 되는 것이다. 십자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불교 신자들에게 보여주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노력으로 될 수 없습니다. 저희도 저희의 애씀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십자가 지는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그 비결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노력으로 안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다.
내가 주인된 삶을 회개하고,
나를 예수님께 드릴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당당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이런 메시지를 들려주었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이것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보여주기는커녕 믿는 우리가 더 죽으려 하지 않는 현실이다. 우리의 비참함이 여기에 있다. 경건의 능력은 다 잃어버리고 경건의 모양만 겨우 갖추고 있는 모양새이다.

성도들이 만약 설교자인 나에게 상처 받는 일이 발생한다면, 강단에서는 날마다 은혜로 죽는다고 설교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비겁하게 사는 길을 택하는 모습을 보일 때일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까봐 늘 두렵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당시 바울의 상황을 보면 바울을 괴롭히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왜 할례를 받지 않느냐고 공격한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은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해 바울이 한 고백이다.

여기 나오는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인데, 이는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노예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 찍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이란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이 예수의 소유가 된 흔적을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육신의 할례보다 소중한 것, 예수의 흔적이 있다. 내가 주의 종으로 헌신하며 살다가 고난과 상처를 받은 흔적, 자격 없는 나를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 내 몸에 있다!”

우리에게는 이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흔적, 지금까지 나를 견인해주신 주님의 사랑의 그 흔적이 우리에게 있는가?

너무나 낯선 시카고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하던 스물세 살 어린 나를 주님이 어떻게 인도해주셨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그 사랑이 어떻게 나를 인도해주었는지, 부인할 수 없는 그 예수의 흔적이 나를 오늘에 이르게 해준 동력이 되었다면, 우리가 날마다 그 감격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고요한 새벽에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찬양 하나가 내 입술에서 몇 번이고 고백되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고요한 시간
주님의 보좌 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나 염려 하잖아도 나 쓸 것 아시니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 다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이 사랑의 마음으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사랑의 마음으로 헌금을 하고,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님 앞에 잠잠히 돌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 귓가에 지금도 속삭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네 마음을 다오!’

† 말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 시편 139장 9, 10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6절

† 기도
온 맘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마음을 원하시는 주님께 저의 온전한 마음을 드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적용과 결단
날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있나요?

오늘도 당신의 마음을 원하시는 주님 앞에 사랑의 마음으로 나아가 기도하며 예배하는 하루가 되기를 결단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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