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1장 13-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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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13-15

 


13 형제들아 내가 …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지금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증언한 것, 즉 그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주님께 계속해서 구했다는 점을 확증한다. 만일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부주의해서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의 고백은 공허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부족했던 것은 그들에게 가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아니라 기회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로마를 방문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이 여러 번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이 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도들을 겸손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그러한 겸손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그분의 섭리를 바라보고 거기에 의지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여 자주 그들이 의도하는 바를 꺾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그들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이 아니면 그 어느 것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일을 우리의 능력으로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참람하고도 뻔뻔스러운 짓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신랄하게 꾸짖는 바이다(약 4:13).

바울은 길이 ‘막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을, 주님께서 그를 좀더 급박한 일에 사용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 급박한 일을 소홀히 했으면 교회에 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길을 막는 것은 서로 다르다.

불신자들은 주님의 강한 손이 제지하고 있어서 거기서 움직일 수 없을 때만 자기들의 길이 막힌다고 생각한다. 반면 신자들은 어떤 진짜 이유가 있어서 자기들의 길이 막히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본분을 넘어서는 일이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반대되는 일을 시도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서도 …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바울이 주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서 모으라고 하신 그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요 15:16).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열매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열매라고 부른다.

신자들의 가장 참된 특징은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행복은 그분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자기가 ‘다른 이방인 중에서’ 열매를 거두었던 것을 생각해낸다. 아주 많은 이방인들이 그로 인해 유익을 얻었으므로, 그가 로마인들에게 가는 것이 무익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줌으로써 그들을 고무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이어서 나오는 ‘지혜 있는’과 ‘어리석은’이라는 형용사는 ‘헬라인’과 ‘야만인’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네덜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인문주의자. 신약성경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새롭게 다시 번역함)는 이 형용사들을 ‘학식 있는’과 ‘무식한’으로 아주 훌륭하게 번역했지만, 나는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로마인들이 아무리 학식이 높고 사려 깊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해도, 바울은 자기가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 확신이 교만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그는 자신의 직분에 근거해서 논증을 펼친다.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지혜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빚진 자가 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두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복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혜 있는 자들에게 약속되고 제시된다. 이는 주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그분께 복종시키셔서, 모든 재주와 각종 학문과 온갖 예술의 극치가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단순함에 자리를 내어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혜 있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그 마음이 아주 부드럽고 수용적으로 되어서, 무지한 자들을 그들의 선생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함께 배우는 동료 제자들로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다. 예전 같으면 자기를 낮춰서 그들을 같은 문하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학식이 없는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에 거기서 도망가서도 안 된다. 바울이 그들에게 빚진 자였다면, 그리고 훌륭한 믿음을 빚진 자로 여겨지기를 원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기가 빚진 것을 갚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지한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모든 교사들이 따라야 할 하나의 규칙이 있다. 즉, 부드럽고 자상한 방법으로 무지하고 학식이 없는 사람들의 수준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사들은 많은 어리석은 행동들과 질색할 만한 끊임없는 일들을 더 차분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 때문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교사들의 책임이 그들의 우매함을 지나치게 받아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는 로마에 가고자 하는 자기의 열망에 대해서 지금까지 언급한 바의 결말을 짓는다. 주님을 위한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자기 본분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이 불경건한 자들의 비웃음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미리 선언하는 것을 보면,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것을 예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는 복음의 가치를 찬양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로마인들이 복음을 물리치지 못하도록 한다.

자기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사실 그는 복음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하찮게 보였다는 것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치욕을 참아낼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킨다. 이는 복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될 때 복음을 경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신자들에게 복음이 가지는 최상의 가치를 입증한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드높여야 한다면, 그 능력은 복음 안에서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가 찾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분의 선하심을 나타내주는 것은 복음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영광과 드높임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의 능력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주므로,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복음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신다고 선언할 때, 바울이 말씀 사역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 주목하라. 여기서 그는 어떤 비밀스러운 계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을 듣지 않고 물러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며,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손길을 멀리 뿌리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교사로 임재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실 때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어구를 덧붙인다.

사실 복음은 구원을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이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이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는 사실은,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사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복음은 구원의 유일한 방편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모든 길에 대한 신뢰를 차단시켜버린다. 사람들이 이 유일한 구원으로부터 떨어져나올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의 파멸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복음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이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을 구원에 참여하도록 초대할 때, 그것을 구원의 교리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이는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분 고유의 직분은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그분에 의한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은 그분을 심판자로 만나게 될 것이다. 성경 전체에 걸쳐 구원이라는 단어는 사망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 우리는 어떤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복음은 파멸과 영원한 사망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해내므로, 그것이 보장하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유대인과 헬라인을 비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바울은 ‘헬라인’이라는 말 속에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시킨다. 그는 이 두 부류에 온 인류를 포함시킨 것이다. 그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특별히 헬라인을 선택한 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유대인들 다음으로 맨 먼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도록 허락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헬라인들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에 가까이 있고 그 언어가 널리 퍼져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에 참여하는 면에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결합시킨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진 고귀함과 위엄을 박탈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에 첫 번째로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한 특권을 그대로 인정해준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그는, 그들과 복음을 공유한 자들로서 이방인들을 덧붙인다.


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은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진술한 앞 절에 대한 설명이자 확증이다. 우리가 구원,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먼저 의를 구해야 한다.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과 화목하게 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만이 존재하는 삶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의로워야 한다.

그분은 불의不義를 몹시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어구는 우리가 복음으로부터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외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계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의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구해내신다. 우리 구원의 기초가 되는 이 의는 복음 안에서 계시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원인에서 결과까지 논증을 펼 수 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보화, 즉 그분의 의를 전해주신 것이 얼마나 진기하고 귀한지 주목하라.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그분의 법정에서 인정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사람이 보기에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미래의 그리스도의 나라에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도처에서 말씀하신 여러 예언들을, 바울이 여기서 넌지시 비추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부 주석가들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설명한 의미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다. 좀더 중요한 문제는, 일부 주석가들이 값없이 죄를 용서해 주는 것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거듭남의 은혜에도 이 ‘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적절한 곳에서 좀더 길게 다룰 것이다.

이제 그는 앞에서 사용했던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표현 대신 ‘믿음으로’라는 말을 쓴다. 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시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에’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는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고 지식이 자라갈수록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서 커지고 우리가 그 의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확증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복음의 맛을 볼 때, 우리를 은혜롭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러나 멀리서 볼 뿐이다. 참 종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더 분명하고 스스럼없이 보게 된다. 마치 그분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시기라도 하는 것과 같다. 이 어구에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대조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생각은 그 근거가 충분하지 않고 애매하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 아래 살았던 조상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이루어가는 매일의 진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하박국 선지자의 권위를 빌어 믿음에서 난 의에 대해서 증거한다. 하박국은 교만한 자들의 파멸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고 덧붙인다. 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래 시제로 된 ‘살리라’라는 동사는 그가 말하고 있는 삶이 끊어지지 않고 영원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 삶은 잠시 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 또한 삶에 대한 헛된 생각으로 우쭐해 있지만,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잠시 동안만 지속되는 그림자이다.

오직 의인의 믿음만이 영생을 가져다준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께 의존하게 해주는 믿음 외에 무엇이 삶의 원천이겠는가? 하박국 선지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만 우리가 견고히 선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그에게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 대한 자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심에만 자기들을 맡길 때, 오직 그때만 그들의 삶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하박국이 이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는 값없이 얻는 의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로 미루어볼 때, 하박국의 증언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절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또한 우리는 그의 논증으로부터 믿음과 복음간의 상호 관계를 필연적으로 추론하게 된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했으므로, 바울은 그러한 삶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이 서신의 첫 부분의 가장 중심이 되는 요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바울이 직접 한 말을 통해 이 요점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다는 것은 나중에 문맥을 통해 쉽게 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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