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2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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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 2:1,2

 


1 그러므로 … 사람아, …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이 책망의 말씀은 외적인 거룩함을 과시함으로써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위선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족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셨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바울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는 증거로서 더 가증스러운 부도덕한 행위들을 보여주고 나서,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믿음이 두터운 자라고 여기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들은 그가 제시한 첫 번째 죄악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의 추론은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해서, 그가 어떤 식으로 자기의 논증을 펴나갔는지 의아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그들을 ‘핑계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네가 다른 이들의 그런 부도덕한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대적하며 꾸짖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할지라도, 네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살핀다면 네게 그런 죄악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어떤 항변도 할 수가 없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크리네인’(krinein, 판단하다)과 ‘카타크리네인’(katakrinein, 정죄하다)이라는 두 헬라어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멋진 언어 유희를 펼친 것 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그들을 정죄하는 데 사용한 과장법이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너는 두 배로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네가 정죄하고 비난하는 다른 사람의 그 부도덕한 행위를 바로 네가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이런 말이 있다. “다른 이들에게 삶의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결백하고 합리적이며 온갖 덕을 행한다고 주장하는데, 만일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치려고 하는 그 동일한 잘못을 행할 경우, 그들은 용서 받을 만한 자격이 조금도 없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 구문은 직역한 것으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네가 판단을 할지라도 너는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 상태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진술한다.

죄는 엄밀히 말해서 마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면에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는 셈이다. 즉, 도적질한 자와 간음한 자, 중상하는 자를 비난할 때 그들은 단순히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분리할 수 없는 그 부도덕함에 대해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서 바울이 의도한 바는 위선자들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그들의 자기 만족감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을지라도 혹은 스스로를 무죄하게 여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뭔가를 얻었다고 착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아주 다른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는 그들 내면의 부정함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정함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증언으로 입증하거나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분의 심판 앞에서는 어둠 자체를 숨길 수가 없다. 또한 죄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에 대한 소송은 그분의 심판에 따라 결정되어야만 한다.

이 심판의 ‘진리’는 두 가지로 드러날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누구에게서 죄를 찾아내셨든 간에 그 사람의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죄를 벌하실 것이다. 둘째, 그분은 외적인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참으로 신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행위에도 만족하지 않으신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거짓된 경건의 가면을 쓴다 하더라도 그분은 자신의 심판을 통해 은밀한 사악함을 벌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리대로’라는 어구는 히브리 어법을 따른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진리’는 종종 마음의 내적 온전함을 의미하며, 그러하기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거짓뿐만 아니라 외견상 선한 행위로 보이는 것과도 반대되기 때문이다. 위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거짓된 의義뿐만 아니라 그들의 은밀한 감정에도 주의를 기울이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만 정신을 차리게 된다.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롬 2:3-10

 


3 사람아, 네가 … 생각하느냐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맹렬한 비난을 삼가는 것이 수사학修辭學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자기가 고발하고자 하는 바를 입증하기 전에 심한 혹평을 한 것은 분별 없는 행동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그들이 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증거는 충분히 결정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 앞에 그들을 고발한 것이 아니라 양심의 심판으로 그들의 유죄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가 의도한 바를 입증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즉, 그들이 스스로를 살피고 하나님의 면밀한 심판을 따르게 될 때, 자기들의 불의함을 부인否認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들의 거짓된 고결함을 그토록 혹독하고 신랄하게 비난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허울뿐인 그들의 자신감을 흔들어놓지 않는 한, 놀라울 정도로 스스로를 철석같이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선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마취 효과에서 깨어나게 해서 그 위선을 하나님의 심판의 빛 앞으로 끌고 가는 것임을 기억하자.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바울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논증을 펴고 있다. 만일 우리의 죄가 인간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그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분은 모든 심판자들 중에 유일하게 참된 심판자이시다. 인간이 신적인 본능에 이끌려서 악한 행위를 정죄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미약하고 희미하게 닮았을 뿐이다. 다른 이들이 그들의 판단을 피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어리석은 자들이다. 바울은 ‘사람아’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이는 사람을 하나님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4 그의 인자하심과 …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내가 볼 때 이 구절에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바울은 이의異意가 제기될 만한 내용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의 형통함에 대해 우쭐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멸하는 그들의 마음은 더 완고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의 교만함을 미리 조처하는 것이다. 그는 반대 논증을 폄으로써, 그들이 외적으로 형통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신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될 만한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죄인들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형통함을 신뢰하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인자하심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현세現世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보전해주신 자들에게는 더 과중한 형벌이 부과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악함에 더하여,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호의가 아버지로서의 그분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여러 증거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마음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실 때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절을 베푸시면서 자기들을 관대하게 지원해주신다고 해서, 자기들이 그분께 사랑스러운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스스로의 형통함을 자축自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통하여, 스스로의 안녕安寧을 간절히 원한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우리가 그분의 자비하심을 더 담대하게 바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확신을 더해주시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을 이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함을 늘 동일한 견지에서 봐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시고 그들에게 세상적인 복을 주실 때, 그분은 이런 종류의 표지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의 선한 뜻을 알리시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오직 그분 안에서만 모든 선한 것들을 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을 어기는 자들을 동일한 은혜로 대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인자하심을 통하여 그들의 완고함을 누그러뜨리려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그들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내적內的으로 만지지 않으신다면 귀머거리들에게 간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해 우리는, 이 경우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사악한 본성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나는 ‘요구하여’calleth라는 말보다는 ‘인도하여’leadeth라는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후자가 더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인도하여’라는 말을 무리하게 몰아댄다는 의미보다 오히려 손을 잡아 이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리가 주님의 권고하심에 대해서 고집을 피울 때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주님의 심기心氣를 건드린다.

주목할 만한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앞에서 내가 이미 언급한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즉,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가혹한 심판을 스스로에게 쌓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속적으로 향유하는 하나님의 선물들 또한 그들의 정죄를 가중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모든 선물들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심해진 자기들의 극한 사악함에 대해 비난 받아 마땅함을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고침 받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옳지 못하게 남용함으로써 이런 식으로 재앙을 쌓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

진노의 날 직역하자면 ‘그 날에’(into the day)라고 할 수 있다[헬라어로는 ‘에이스 헤메란’(eis hemeran)이며 ‘그 날을 위하여’(for the day)라는 의미이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지금 그들 주변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 그 날에 그 진노가 그들 머리 위로 거침없이 쏟아질 것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파멸을 자기들에게 쌓고 있으며,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창고에 쌓여 있던 그 파멸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은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이 날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진노의 날’이라고 불린다.

주님의 오심을 언급하는 다른 모든 경우들을 볼 때, 이런 식으로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항상 두렵고 무시무시한 날로, 그러나 경건한 자들에게는 기쁘고 즐거운 날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님의 가까이 오심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경건한 자들에게는 크게 기뻐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버림 당한 자들을 향해서는 공포와 두려움을 선포할 뿐이다.

스바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습 1:15). 요엘서 2장 2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 5:18). ‘나타나는’이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바울은 이 ‘진노의 날’이 어떠할 것인지 넌지시 비춘다.

즉, 그때가 되면 주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분명하게 보이실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날마다 이 심판에 대한 암시를 주시지만, 책들이 개봉되고 양과 염소가 나뉘고 알곡에서 가라지를 제거하는 그 날이 되기까지 그분은 그 심판을 분명하고 충분하게 드러내는 것을 연기하고 보류하신다.


6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바울은 거룩한 척하는 눈먼 위선자들을 다루어야 했다. 그들은 겉보기에 그럴듯한 몇 가지 공허한 행위들로 포장하기만 하면 자기들 마음의 사악함이 감쪽같이 감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실 의로운 행위의 참된 특성을 지적한다. 혹시 그들이 말이나 단순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을 가질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다. 주님께서는 정당한 보응을 통해 버림 당한 자들의 사악함을 벌하심으로써,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실 것이다.

그분은 또한 자신이 이전에 영화롭게 하기로 정하신 자들을 성결케 하심으로써 그들의 선한 행위를 높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의 구절에서 선행에 대한 보답이 공로에 기인한 것임을 입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선한 행위가 어떤 보상을 받게 될지 선언하지만, 그 행위의 가치 혹은 그것에 합당한 값어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보상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 일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7 참고 선을 행하여 라틴어 역에는 ‘perseverantia’(꾸준함, 영어의 ‘perseverance’)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patientia’(인내, 영어의 ‘patience’)라고 읽는 것이 훨씬 더 그 의미를 잘 표현해준다. 꾸준함은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인내 또한 요구되는데, 인내로 말미암아 그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시험을 만나더라도 견고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탄은 성도들이 주님께 쉽게 나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수많은 장애물들을 통해 그들을 방해하고, 그들을 올바른 길에서 돌아서게 하고자 애쓴다. 신자들이 계속해서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를 구한다’고 말할 때,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갈망한다거나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구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분 나라의 복락福樂을 동시에 구하고자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그것을 알기 쉽게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선을 행하고자 애씀으로써 썩지 아니함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영생永生을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8 당을 지어 …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이 구절은 약간 애매하다. 우선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가 끊어진다. 논증의 맥이 이어지려면 비교 대상이 되는 두 번째 항목은 첫 번째 항목의 문장 구조와 일치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실 것이지만, 다투기를 좋아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런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전자前者를 위해서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보장된 반면, 후자後者를 위해서는 진노와 고통이 준비되어 있다.”

이 구절이 애매한 또 다른 이유는 ‘진노, 분노, 환난, 곤고’라는 단어들이 문맥상 서로 다른 두 개의 절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의 의미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을 읽을 때 이런 점이 발견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멋진 수사법은 다른 저자들에게서 배울 일이다. 세련되거나 고상한 맛이 부족하고 충분히 문학적인 표현 양식을 갖추지 못한 이 글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영적인 지혜이다.

여기에 언급된 ‘당 짓는 것’은 반항적이고 고집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은 아무 개념 없이 가증스러운 자기 탐닉에 빠짐으로써 하나님을 비웃고 경멸하는 위선자들과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말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할 뿐이다. 그분의 뜻만이 진리의 빛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멍에를 짊어지기보다는 항상 죄악에 굴복하는 쪽을 택하는 것은 모든 불신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아무리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야유를 보내며 완강하게 대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누가 봐도 악인惡人임이 분명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조롱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선자들은 그 진리를 대적하여 거짓된 예배 형태를 만들어 내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런 불순종하는 자들이 ‘불의不義를 따른다’고 덧붙인다. 주님의 법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죄의 노예 상태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해줄 중간 지대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난폭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보상이다.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이 단어의 본질절인 의미를 살리려면 이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다.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43. 로마 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가 그의 저서 《투스쿨란의 대화》Tusc. 4권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처럼, 헬라어로 ‘쑤모스’thumos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excandescentia’(분노, 영어의 indignation)라고 부르는 것으로, 갑작스러운 분노의 폭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나머지 단어들에 대해서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을 따랐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네 단어 중에서 마지막 두 단어(환난과 곤고)는 앞의 두 단어(진노와 분노)의 결과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노여움과 언짢음을 경험하는 자들은 즉시 부끄러움을 당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참 신자들이 받게 되는 복과 버림 받은 자들이 당하는 파멸에 대해서 한두 마디로 간략하게 기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좀더 효과적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얻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북돋우기 위해서, 그는 이 두 가지 주제를 자세하게 진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 심판에 대해서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주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여러 가지 자극을 받음으로써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내세에 대한 갈망으로 가슴이 사무치는 일도 없다.


9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여기서 ‘유대인’은 단순히 헬라인과 대조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나중에 바울은 지금 여기서 헬라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 유대인들은 순서상 헬라인보다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우선해서 율법의 약속과 경고를 둘 다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그분의 심판은 유대인에게서 시작해서 온 세상을 아우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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