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2장 11-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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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1-13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지금까지 바울은 인류 전체가 유죄有罪하다고 한데 묶어 비난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로 분리해서, 자기가 비난하는 바를 깊이 자각시키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 둘이 똑같이 영원한 사망에 처한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가르쳐준다.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변명으로 내세우려 했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바울은 전자前者에게서 교묘하게 발뺌하려는 시도를 없애버리고, 후자後者에게서는 거짓되고 무익한 자랑을 제거하고 있다.

온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나머지 인류로부터 구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모두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 이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이러한 구별이 있다고 해서 그들 양쪽이 동일한 죄에 연루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성경에서 ‘외모’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거나 자랑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외적인 실체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즉, 그분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가치를 두는 가문家門이나 나라, 고위 관직이나 부富가 아니라, 마음의 순전함 혹은 내면의 온전함이다.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여기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차별을 두거나 그들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값없는 선택은 없는 것이 아니냐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납하시는 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순전한 인자하심으로 무無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시는 차원이다. 그분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에 그분의 칭찬을 받아 누릴 만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분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은사들을 부어주시며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그분 아들의 형상에 대해 호의를 베푸시는 차원이다.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이 절의 상반절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을 공격한다. 그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공포公布하고 재가裁可할 모세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한 정당한 사망 선고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죄인에게 공정한 유죄 선고를 내리는 데 반드시 문서화된 율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복음의 빛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무지無知해서 그런 것이라면서, 그들에게 잘못된 자비를 베풀어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하게 해주려고 시도하는 자들의 주장을 주시하도록 하자.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자기들의 이성理性의 오류로 말미암아 미혹 당한 이방인들이 곤두박칠치듯 파멸로 치닫는 것처럼,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율법에 의해 정죄를 당한다.

이는 오래전에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26)는 형벌이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면서 죄인인 자들에게는 더 열악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율법에 이미 그들에 대한 정죄가 선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13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바울은 유대인들이 제시할 수도 있을 법한 이의異意를 예상하고 그것에 대해 앞질러 논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만 유일하게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의의 규범(신 4:1)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는 율법을 듣거나 아는 것이 의를 제공해줄 만큼 그렇게 대단한 결과를 낳지는 않으며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라는 말씀처럼 율법에 대한 들음이나 앎에는 행함이 그 증거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고자 한다면 그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완전한 행위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稱義의 개념을 조작해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만인의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무런 유익도 없는 논쟁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칭의에 대해 장황하게 토론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일일 뿐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가 언급한 율법의 심판에 대해서만 유대인들에게 역설한다.

즉,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않는 한 그들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며, 율법을 범할 경우 즉시 그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에 절대적인 의가 제시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여 유죄 선고를 받은 터라, 다른 의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참으로, 어느 누구도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사람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아무도 의롭다 칭함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무를 다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4-16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제 바울은 13절 상반절에 대한 증거를 반복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주장으로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선언하는 것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논증을 펴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신시킴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갈망과 사랑을 우리에게서 불러일으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들이 무지를 변명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의에 대한 어떤 규범을 가지고 있음을 그 행위를 통해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다운 면이 전혀 없어서 어떤 법률의 제한도 받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지내는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다. 모든 나라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자진해서 스스로를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의와 공정함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바로 헬라어에서 ‘프롤렙쎄이스’prolepseis라고 부르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본성적으로 심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실제로 율법은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그들에게 모세의 성문법成文法은 없지만 정의와 공정함에 대한 지식이 전무全無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런 지식이 전혀 없었다면, 그들은 악덕과 미덕을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덕에 대해서는 벌을 줌으로써 그것을 제지하는 한편, 미덕에 대해서는 보상을 통해 영예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인정하고 칭송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인간의 본성을 기록된 율법과 대조하고 있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의義에 대한 선천적인 빛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배우지만, 이방인들은 그 율법 대신 이 빛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었던 것이다.


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 마음에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새겨져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 분별력과 판단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정의와 불의不義, 정직함과 부정직함을 구별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힘이 그들의 의지에 새겨져 있어서 그들이 부지런히 그것을 찾고 구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진리의 힘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을 도무지 부인否認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간음과 도적질을 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러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라고 바울이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 구절에서 ‘의지의 힘’(the power of the will)을 추론해낼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감정이 자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음의 구절들에서처럼 그저 ‘이해력’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미련하고 …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이 구절에서 인간 안에 율법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본성에 정의의 씨앗이 얼마간 심겨져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같이 종교 의식들을 제정하고, 간음과 도적질과 살인을 응징하는 법을 만들며, 상업적인 거래와 계약에서 탄탄한 신용을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간음과 도적질과 살인은 악이며 정직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기들이 알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부류의 신神으로 받아들이는지 혹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신들을 고안해왔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 같은 분이 계시며 그분은 영광과 경배를 받아 마땅하다고 그들이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아내나 소유물이나 그에게 속한 어떤 것을 탐하는 행위를 허용하든지 아닌지 또는 그들이 분노와 증오를 묵인하든지 아닌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잘못된 행실이라고 알고 있는 바를 그들이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천 명의 증인에 상당하는 그들 자신의 양심의 증거,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가장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인간은 자기가 선행을 했다는 것을 앎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지만, 악을 행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내적으로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이방 격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 것이다.

“선한 양심은 가장 넓은 활동 무대이지만, 악한 양심은 가장 악랄한 사형 집행인으로서 어떤 원귀怨鬼보다도 더 잔인하게 경건한 자들을 괴롭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떤 행위는 선하고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반면 다른 행위는 몸서리를 치면서 피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율법에 대한 어떤 선천적인 지식이 있다.

바울이 양심에 대해서 얼마나 학자다운 정의定義를 내렸는지 주목하라. 그는, 우리의 바른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생각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악행에 대해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생각들도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는 이 과정을 주님의 날에 연결시킨다.

이는 그 과정이 그 날이 되어야만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날에도 효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세에서도 그 생각들은 계속적으로 그 기능을 행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이런 논증을 펴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그 생각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거나 금방 사라질 것으로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앞에서 그런 것처럼 그는 여기서도 ‘그 날까지’보다는 ‘그 날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6 하나님이 …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러한 완곡한 정의는 이 구절에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도덕적 무감각이라는 은신처에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숨기는 사람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지금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철저하게 숨겨져 있는 은밀한 생각들이 그때가 되면 빛 가운데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근거한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고전 4:5)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한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우리의 심판자 되시는 분께 진정으로 인정을 받기 원한다면 마음의 신실함을 위해서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권면을 기억하자.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그가 이 표현을 덧붙이는 것은, 자신이 인류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판단력에 상응하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으므로 이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물론 참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에게 복음을 줄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 사도들은 단지 그 복음을 나누어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복음이 한편으로는 장차 있을 심판을 전하고 선언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완전한 실행이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나기까지 미루어진다면, 그것은 반드시 마지막 심판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부활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멸망이 된다는 점을 입증하지 않고서는 그분을 전할 수가 없다. 부활과 멸망, 이 둘은 모두 심판의 날에 속한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심판의 날에 적용한다.

이 표현에 대한 다른 해석들도 있지만, 그 의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지명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행하시리라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심판을 언제나 복음의 중요한 내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이 문장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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