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3장 9-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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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9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바울은 중심 주제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자기들을 낫게 여기는 이유로 삼았던 영예로운 특징들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이제 그는 ‘그들이 어떤 면에서든 이방인들보다 나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마침내 대답한다. 그의 대답은 그가 앞에서 말한 것과 조금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앞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을 그들에게서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불일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인정한, 그들을 탁월하게 해주는 그 특권들이 그들에게는 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특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들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이 자랑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본래 가지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가 제기한 두 가지 대답은 서로 너무도 잘 들어맞아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나온 당연한 결론이 된다. 그가 그들의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은혜에 포함시키면서 칭찬한 것은, 그들이 자기들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칭찬을 근거로 그가 지금 대답하고 있는 내용을 곧바로 추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나은 주된 이유라면,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 탁월함을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자랑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채택한 거룩한 기교를 주목하라. 그는 유대인들이 탁월함을 가졌다고 언급할 때는 그들을 3인칭으로 부른 반면, 그들에게서 모든 특권을 박탈할 때는 모욕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그들 중에 포함시킨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헬라어 동사 ‘아이티아스다이’aitiasthai는 엄격히 말해 법정 관련 용어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부분을 ‘우리가 고발하였느니라’라고 풀이하고 싶다. 소송에서 원고原告는 다른 증언들과 증거들을 동원해서 죄를 입증할 준비를 갖추고 죄를 ‘고발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도 바울은 온 인류를 하나의 정죄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한다.

여기서 그가 모든 사람을 단순히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소 사실을 좀더 특별하게 입증하고 있다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키케로가 어떤 글에서 고발과 비난을 구분하면서 말한 것처럼, 고발은 확실하고 타당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면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정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우리가 죄에 합당한 저주 아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의義가 있는 곳에 사죄赦罪가 있듯이, 죄가 있는 곳에는 정죄가 따르기 마련이다.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0-18


10 기록된바 지금까지 바울의 논증 과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부정不淨함을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제 그는 권위에 의지해서 논증을 시작한다. 권위가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고 할 때, 그 권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이 사실로부터 교회의 교사들은 자기들이 맡은 직분의 특성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그 어떤 교리도 주장하지 않고 다만 성경의 확실한 증거에 의지해서 자신이 확증하는 바를 주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바울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 받은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사명도 받지 않은 교사들은 더더욱 교리를 주장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의인은 없나니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골자骨子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아, 사도 바울은 세세한 사항을 다루기 전에 먼저 개괄적인 상황을 진술한 것 같다. 그는 다윗이 사람 속에 있다고 선언한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定義한다. 즉, ‘의인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이 불의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열거한다.

 


11 깨닫는 자도 없고 불의의 첫 번째 결과는 깨닫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무지함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서 곧 입증된다. 그 어떤 다른 지식을 소유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과학과 예술조차도 그 자체는 선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12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그가 덧붙이는 이 어구는 사람들이 인간성에 대한 모든 감각을 버렸다는 뜻이다. 우리 서로간의 관계를 가장 잘 결속시켜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는 것처럼(그분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를 온전히 화목하게 하신다. 그분이 없이는 불화만 있을 뿐이다), 몰인정은 흔히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이 있는 곳에 생겨난다. 그때는 각 사람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한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즉, 그들의 목구멍은 사람을 집어삼키는 깊은 구멍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을 식인종(안드로포파구스, anthropopagus)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구멍이 다른 사람을 집어삼킬 만큼 그렇게 크다는 것은 흉악함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와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는 표현은 같은 의미이다.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이것은 앞 절에 나온 것과 반대되는 악으로서, 그들이 모든 면에서 사악함을 뿜어낸다는 뜻이다. 만일 그들이 상냥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속이면서 아첨하는 말에 독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저주’와 ‘악독’이다.


15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바울이 이사야서(사 59:7 이하 – 편집자 주)에서 인용한 이 말씀은 가장 충격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도로 난폭한 잔인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잔인성은 가는 곳마다 모든 것들을 파멸시킴으로써 고독과 황량함을 낳는다.

플리니(Pliny,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쯤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한창이던 당시 오늘날 터키의 북부 해안 지역인 비시니아 총독으로 임명된 자)는 이와 동일한 표현을 도미티안(Domitian, 81~96. 네로 황제 사후에 등장한 로마의 폭군으로서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함) 황제에게 사용한다.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은 강탈과 폭행과 악행, 그리고 흉포하고 잔인한 짓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친절하게 호의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결론에서 그는 우리가 처음에 진술했던 내용을 다른 말을 써서 반복한다. 즉, 모든 사악함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지혜의 본질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저버릴 때, 우리 안에는 의롭거나 순수한 그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은 우리의 사악함을 저지하는 굴레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버리면 우리는 온갖 종류의 방탕한 행위에 제멋대로 빠져들게 된다.

구약의 이 구절들이 그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인용되지는 않았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인용문 각각을 그 문맥 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시편 14편 3절에서 다윗은, 인간 안에 있는 부패함이 너무도 심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굽어 살피셨을 때 단 한 사람도 의로운 자를 찾을 수 없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 악이 온 인류에 두루 퍼졌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시편 14편 끝부분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또 어느 정도로 이 부패한 상태에서 해방되는지 곧 살펴볼 것이다.

다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과 후손들에게서 나타나게 될 그리스도의 나라가 어떤 유형일지 미리 보여주면서, 그의 대적들의 사악함에 대해 불평을 토로한다. 그러므로 그의 대적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있어서 그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전형典型인 셈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명확히 언급한다. 그렇다면 그의 고소는 이방인들에게 더 확실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인간을 제멋대로 내버려둘 때 어떤 모습일지 우리로 보게 하기 위해서 인간 본성을 이런 단어들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자기들 안에 있는 부패함이 고침을 받지 않는다면, 성도들이라고 해서 다른 이들보다 그 상태가 나을 게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육적인 본성의 잔재殘在 속에서 그러한 악의 씨앗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그들이 본성상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악의 씨앗들을 썩어 없어지게 함으로써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 씨앗들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악의 씨앗을 없애는 것에 대해, 인간은 자기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나열된 모든 악들이 모든 개개인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앞에서 1장 26절을 다룰 때 이미 주목했던 것처럼 그 악들이 인간 본성의 탓으로 여겨지는 것은 여전히 정당하고 참되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19,20


19 우리가 알거니와 그는 이방인들은 제쳐두고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유대인들을 복종시키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이방인들만큼이나 참된 의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망토로 스스로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되었다는 사실이 자기들을 충분히 거룩하게 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사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언제든 도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구실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인류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표현을 하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인류가 공통으로 처해 있는 조건에서 제외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표현들을 대개 이방인들에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들 고유의 위치를 잃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분명 인류가 처한 공통적인 상황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가치에 대한 잘못된 자만심이 그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을 그들이 이방인들에게만 제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제기할 반론을 예상하고는 성경이 선포하는 바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동일한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동일한 정죄 아래 있다. 우리는 바울이 이러한 반론을 논박하는 데 얼마나 신중한지를 본다. 사실 율법이 유대인에게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또 율법은 유대인들을 교훈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율법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진술하는 내용은 부수적인 것 혹은 경구警句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레르곤’(parergon, 부속물, 첨가물)에 불과하다. 율법의 교훈은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로 적용된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그는 율법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율법이 엄격히 말해 유대인들과 관련된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말에 선지자들도 포함시킨다. 즉,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율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즉, 모든 책임 회피와 변명의 근거를 막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이 은유는 법정에서 따온 것이다. 법정에서는 피고가 합법적인 변호로 진술할 내용이 있을 경우, 자기에게 제기된 혐의를 풀기 위해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구한다.

그러나 피고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경우, 그는 침묵하며 아무 말 없이 유죄 선고를 기다린다. 그는 자신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이미 유죄 선고를 받은 셈이다. 욥기 40장 4절에 나오는 “나는 …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라는 표현도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욥은 자기에게 어떤 변명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자기 변호를 그치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판결에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앞의 어구에 대한 설명이다. 꼼짝없이 유죄 선고를 받아서 도무지 발뺌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입이 막히기 때문이다. 다른 성경 본문에 보면, 주님의 면전面前에서 침묵하는 것은 그분의 위엄 앞에 떠는 것이고 그분의 찬연한 빛을 보고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것이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박학博學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약간 미해결된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가 율법 전체의 준수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표현이 의식儀式들만 가리킨다고 본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349~407.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로서 뛰어난 설교자이기도 함)과 오리겐과 제롬(Jerome, 347~420. 초대교회의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함)은 여기에 ‘율법’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을 보고 후자의 의견을 수용한다.

이 어구가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오류를 막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말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추가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우리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순종하고자 애쓴다면, 그 행위는 그분 앞에서 정당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행위에서 칭의稱義의 능력을 좀더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 많은 (만일 행위에 그런 능력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런 행위들을 ‘율법의 행위’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율법에 약속이 담겨 있고, 그 약속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이유를 알게 된다.

즉, 우리의 행위가 평가를 받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 교수들도 이 사실을 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위는 아무런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가치 있게 된다’는 진부한 격언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면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행위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항상 타락한 상태에 있고, 그 죄악은 우리의 행위가 그 어떤 공로도 인정 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율법의 값없는 약속에 달려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단순한 행위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구별해서 확실하게 언급한 것은 정당하고 현명한 처사이다. 율법 준수는 본래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였다.

다른 박식한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제시한 논증은 기대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들은 할례에 대한 언급이 오직 의식儀式들과만 관련된 하나의 예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바울이 할례를 언급했는지 이미 설명했다. 이는 오직 위선자들만이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확신으로 우쭐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자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볼 때 할례는 율법에서 나오는 의를 얻기 위한 일종의 기초 과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할례는 그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행위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 행위에서 난 의의 토대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들 학자들은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할례를 반대한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 오직 의식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그러나 그 논증 역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의식들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불어넣었던 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이 잘못된 확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는 단순히 의식들만 언급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으며 또 그 의식들의 가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하지도 않는다. 이 주제와 관련된 모든 성경 본문들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율법 전체를 포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펼쳤던 논증의 성격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바울이 여기서 율법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가 지금까지 따라왔고 앞으로도 계속 따라갈 일련의 논리가 우리의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다른 많은 성경 본문들도 우리가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바울은 이 진리에 대한 그 나름의 이유를 제시했고 곧 그 이유를 다시 언급할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를 범하여 율법에 의해 의롭지 못하다는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명제와 죄를 범하여 유죄하다는 명제, 이 둘은 서로 반대된다. ‘육체’라는 말은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별히 구체적인 설명이 없을 때는 사람을 의미한다. 갈리우스(Gallius, 기원전 126~62. 로마제국의 위대한 배우이자 키케로의 친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All men)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모든 죽을 인생’(All mortals)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의미심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은 역으로 논증을 펴나간다. 생명과 죽음이 한 원천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즉,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주고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반대 작용을 언급함으로써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는 없음을 입증한 그의 논법은 다음과 같은 주장이 첨가되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한다.

즉, 인간에게 그의 죄를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소망을 단절시켜 버리는 것은 율법에서 분리해낼 수 없는 불변하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율법은 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에, 율법 그 자체는 사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우리는 이 면에서 율법으로부터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은, 죄인임이 드러난 사람은 어느 누구든 의를 박탈당한다는 점이다. 궤변론자들이 하는 것처럼, 반쪽짜리 의(half-righteousness)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서 행위가 부분적으로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이런 일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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