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3장 21-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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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를 그가 왜 ‘하나님의 의’라고 부르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 해석 모두 적절하기에, 우리는 어느 한쪽을 지지하기 위해 논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의, 그리고 그분이 유일한 의로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이 의가 ‘율법 외에’, 다시 말해서 율법의 도움 없이 나타났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율법은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율법의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가 바로 이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얻는 의에 대한 증거’로 율법의 교훈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율법’을 제한해서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융통성 없는 처사라는 것을 나는 곧 밝힐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는 행위로 인한 공로가 배제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이 행위와 하나님의 자비를 뒤섞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모든 확신을 제거해서 완전히 없애버리고 오직 그분의 자비만 내세운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는 어거스틴이 이 구절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중생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이 중생의 은혜는 값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율법의 행위, 즉 사람들이 자기를 새롭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고 스스로 열심을 내서 하는 그런 행위를 ‘하나님의 의’에서 배제한다. 나는 일부 현대 이론가들이 마치 이 교리가 바로 지금 그들에게 계시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자랑스럽게 제시하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모든 행위를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백성들에게 제시한 그런 행위들까지 포괄한다. 바울이 4장 첫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했고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흔히 말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들과 선천적인 본능으로 행하는 행위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그런 행위들까지 인간의 칭의稱義에서 배제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으로 얻는 의의 정의定義라면, ‘어떤 종류의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다만 행위로 인한 공로가 폐해지고, 죄 사함을 받는 것만이 의의 원인으로 확증된다.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명제, 그리고 인간은 영적 중생에서 유래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명제, 이 둘은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값없이 새롭게 하시고 우리 또한 그분의 은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특이한 원리 한 가지를 제시한다.

즉,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기 전까지는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인간을 의롭다 칭하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친 다음, 그분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면서 그분의 칭의의 방식을 설명한다(고후 5:19). 이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는 칭의의 효과와 관련해서 율법을 믿음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는다.

왜냐하면 율법은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약속하기 때문이다(갈 3:12). 또한 율법은 행위의 외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얻는 의에는 행위로 인한 그 어떤 공로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어이없는 반론임이 명백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죄밖에 찾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의지하고 그분의 값없는 약속들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장사지냄으로써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해석자들이 분별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칭의의 시작에만 제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정의定義는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후에 그 결과로서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성결함에서 비할 데 없이 훌륭한 모범이 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30년이 지났을 때에도 그분 앞에 자랑할 만한 아무런 행위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의롭다 칭하신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칠 때, 그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날마다 반복하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행위 때문에 깨어지는 그 양심의 평화는 단 하루만 유지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의롭다 함을 얻은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고, 지금도 우리를 그분 안에서 받아들여진 자로 여기신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서 옳지 못하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의 궤변도 동일한 논증으로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배타적 불변화사 ‘오직 … 만’alone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가 율법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만 돌려져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칭의가 그분의 자비하심으로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불변화사는 시간과는 관계 없이 단순히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종종 ‘그러나’라는 말 대신 ‘이제는’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다. 만일 이 단어를 시간과 관계된 뜻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그리고 나는 교묘히 둘러댄다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기에 이 견해를 기꺼이 인정한다), 이 어구를 의식들만 폐해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의도한 바는 우리를 구약의 선조들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게 해준 은혜를 율법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시간과 관계된 뜻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이 어구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이후에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믿음으로 얻는 의가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믿음으로 얻는 의가 감추어져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얻는 의가 두 가지로 나타났다는 점을 여기서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구약에서는 말씀과 성례聖禮로 말미암아 나타났고, 둘째로 신약에서는 의식들과 약속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통하여 나타났다. 또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의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덧붙여 말할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이 이 어구를 덧붙이는 이유는, 복음이 우리에게 값없는 의를 주는 면에서 율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으로 얻는 의가 율법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면서도, 지금은 그 의가 율법의 증거로 확증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율법이 값없는 의를 증거한다면, 율법이 사람들에게 행위로 말미암아 스스로 의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님이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율법을 이런 목적에 소용되게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값없는 의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원한다면, 모세의 교훈의 주요 골자를 차례대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주어진 회복의 수단은 다름 아닌 ‘복된 씨’에 관련된 복음의 약속에 담겨져 있었다.

그 약속에 따르면, 그 복된 씨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고 그 복된 씨를 통하여 열방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계명들 속에서 우리의 부정不淨함에 대한 증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희생제물과 봉헌된 공물供物들을 통해서 우리는 속죄와 정결하게 됨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예언서에 오게 되면, 우리는 값없이 주어지는 자비에 대한 가장 분명한 약속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를 참고하라.


22 하나님의 의니 바울은 이 칭의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밝힌다. 즉, 그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하며, 믿음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언급함으로써, 그분을 단지 자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의를 승인하시는 분으로만이 아니라 그 의를 빚어내시는 분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마치 그는 그 의가 하나님에게서만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혹은 그 의의 기원이 하늘에 있다고, 그러나 그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 주제를 논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우리의 칭의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율법의 약속과 경고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율법에 대한 완벽하고 절대적인 복종만이 의로 간주된다. 만일 그처럼 완벽한 성결에 이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셔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홀로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믿음으로 얻는 의가 그리스도의 의인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을 때, 동력인(動力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 혹은 변화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네 가지 원인 중의 하나. 그 밖에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이 있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칭의의 질료인質料因이시며, 말씀은 믿음과 함께 도구가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유는, 의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고 믿음은 우리가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자가 될 때, 우리 자신이 의로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 들어 있는 그 어떤 불완전함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지워지기 때문이다. 조건적이었던 약속들도 그 동일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취된다. 이는 값없는 용서로 인하여 우리의 행위가 가지고 있는 결점들이 덮어지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온전한 것으로 보상해주시기 때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칼빈 역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그리고 그들 위에’라고 되어 있음) 알기 쉽게 더 자세히 설명할 목적으로 그는 같은 진리를 다른 표현을 써서 반복한다. 이는 우리가 이미 들었던 내용을 좀더 충분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얻는 데 믿음만 요구된다는 것과 신자들은 외적인 표시에 따라 차별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기에 그들이 이방인인지 유대인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차별이 없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구해야 할 필요성을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역설한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의를 얻는 다른 방법은 없다. 의롭다 칭함을 얻는 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저런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법정에 나아올 때 모든 사람이 죄를 의식하고 자기 자신의 수치심 때문에 허둥대고 당황하며, 우리가 아담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결국 그 어떤 죄인도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는 당연하게 여긴다. 바울은 다시금 역으로 논증을 폄으로써 주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가 다음에 제시하는 요점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의를 내세울 수가 없다고 혹은 그럴 가능성이 전무全無하다고 추론한다. 그러므로 그의 교훈에 따르면,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 외에는 그 어떤 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반쪽짜리 의와 같은 것이 있다면, 인간이 죄인이라고 해서 그에게서 모든 영광을 완전히 앗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의라고 불리는 것의 허구는 이렇게 해서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박탈당했다는 바울의 논증은 아무런 설득력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저주를 없애시기까지는 죄가 있는 곳에 아무런 의도 없음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통하여 그 저주에서 해방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영광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2장 43절에서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박수 갈채를 받는 인간 법정으로부터 우리를 소환해서 하늘에 있는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24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여기서는 헬라어 어법에 따라 분사分詞가 동사 대신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타격을 입은 인간에게는 썩어 없어질 것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비참함을 도우러 오셔서 신자들에게 자신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자기들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오직 그분 안에서만 찾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의의 효력을 이 구절보다 더 인상적으로 설명한 구절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동력인動力因이고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서 질료인質料因이며 말씀을 통해 가지게 된 믿음이 형상인形象因 혹은 도구인道具因임을, 또 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 둘 다에서 기인한 영광이 목적인目的因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력인에 관해서 바울은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더구나 그분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우리 자신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한다.

은혜를 공로와 대립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그는 우리가 불완전한 의의 개념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반복을 통해 자기가 의미하는 바를 좀더 명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궤변가들이 자기 자신의 궁핍함을 억지로 고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여러 부분으로 쪼개어 난도질해놓은 우리 의에 대한 모든 영광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만 돌렸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으며 우리의 소송을 떠맡으심으로써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사망의 폭정暴政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사실, 이것이 질료인이다.

그분이 드리신 속죄제물 때문에 우리의 유죄 사실은 제거된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의를 하나의 자질資質로 보는 사람들의 허구를 완전히 박살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속량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다른 근원으로부터 빌려온 것이 분명하다. 곧바로 바울은 이 구속救贖의 가치와 목적에 대해 설명한다.

이 구속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것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화목제물이라고 혹은 (나는 고대의 표상에 대한 언급을 더 좋아한다) 시은좌施恩座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하게 하실 때에만 우리가 의롭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말한 내용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프로티데나이’protithenai는 어떤 경우에는 ‘미리 결정하다’라는 의미로, 또 어떤 경우에는 ‘나타내 보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가 전자의 의미를 취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희생제물로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을 우리의 중보자로 정하신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제거할 방도를 자진해서 찾으셨다는 것은 그분의 은혜에 대한 이만저만한 찬양이 아니다. 분명 이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과 일치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나 우리가 이 동사의 다른 의미를 택한다 하더라도 그 골자는 동일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중보자로 정하신 그리스도를 그분 자신의 때에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이라는 단어에 고대의 시은좌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표적豫表的으로 주어진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나타났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다른 견해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독자가 좀더 단순한 의미를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나는 이 문제를 결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둘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을 보면 그가 특별히 여기서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꽤 분명해진다. 즉, 그리스도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노하고 계신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실 때 우리는 그분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그분 자신의 솜씨, 즉 그분이 우리를 생명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증오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의 형상의 빛을 꺼뜨려버린 우리의 부정함은 증오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어주심으로 우리의 부정함이 제거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 자신의 순전한 작품으로서 사랑하시고 안아주시는 것이다.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나는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말 하나하나 그대로 놓아두고 싶다. 내 생각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하자마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게 되신다는 사실을 하나의 문장으로 선언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이 유익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피’만 언급했다고 해서 그가 구속의 다른 부분들을 배제시키려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구속의 모든 부분을 이 한 단어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피’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이다. 이렇듯 그는 전체를 대표하는 한 부분을 택함으로써 우리 속죄의 전 과정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게 되셨다고 방금 언급하고 나서, 그는 이제 이 화목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고 덧붙인다. 동시에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언급한다. 즉, 그분의 피가 바로 우리 믿음의 주요 대상이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여기에 사용된 원인을 나타내는 표현(~하심으로)은 의미 면에서 ‘죄 사함을 위하여’ 혹은 ‘그가 죄를 소멸시킬 목적으로’라는 것과 동일하다. 이 어구의 정의定義 혹은 설명은 이미 내가 자주 넌지시 비쳤던 바를 다시 한 번 확증해준다.

즉,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전가轉嫁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의에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는 단지 여러 형태의 표현을 쓰는 것뿐이다. 죄가 사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의를 얻는다면, 그 의는 우리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아가서, 죄 사함 자체가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에서만 나온 행위라면, 모든 공로는 무익하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여기서 왜 죄 용서를 과거의 죄에만 한정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이 어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내 생각에는 바울이 아마도 율법의 속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율법의 속죄는 장차 있을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의 증거였으나,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히브리서 9장 15절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그 구절에 보면, 옛 언약 때 범한 죄에서의 구속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오직 전에 지은 죄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贖해졌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부 극단론자들이 이 구절에 대한 왜곡된 견해에서 끌어낸 완전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단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만한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과 율법의 예표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일을 수행하거나 성취하지는 못했다는 점, 그래서 그 예표들의 실체가 때가 차기까지 연기되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나아가서 우리는 매일 우리가 범하는 죄들도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화목제물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 학자들은 전에 지은 죄들이 용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미래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는 노바투스(Novatus, 3세기에 활동한 분파주의자로서 노바티안파의 창시자, 신앙의 정절을 매우 중요시 여김)와 그의 분파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중에 우리가 타락하면 구속의 유익이 무효가 되거나 없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작정하고 죄를 짓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제시하고 죄인에게는 그분의 자비를 제시하는 것이 복음이 가진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앞 문단에서 진술한 내용이 이 어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이 첨가된 어구는 단순히 그분의 ‘온유함’을 의미한다. 이 온유함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제지되었던 것이고, 우리가 그 불타오르는 심판으로 인한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온유함 때문에 결국 그분은 우리를 용납하셨고 우리로 그분의 은총 가운데 들어가게 하셨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이의가 제기될지 예상한 것처럼 보인다. 이 속죄의 은혜가 후대後代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그 은혜가 나타난 것이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증거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26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이 어구를 반복한 것은 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 어구를 거듭 말했는데, 이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났다는 개념을 바울이 두 번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눈을 열어 그것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모든 영예를 하나님께 돌리도록 설득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곧 이 때에 항상 존재해 온 것을 그가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신 때에 적용한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는 이전에 분명하지 않게 모형模型으로 알려진 것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서 공공연히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때이며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를 모든 시대에 조금은 보이셨다. 그러나 의의 태양이 떠올랐을 때, 그분의 의로우심은 훨씬 더 밝은 빛을 발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대비를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만 분명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의가 나타났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의의 정의定義이다. 또한 그가 1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복음 안에서 알려진 의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그는 이 의義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많은 의로운 자들 중에 한 분이 아니라 의의 모든 충만함을 홀로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온 인류가 불의하다고 정죄를 받지만 하나님만이 홀로 의로우시다는 이름과 영예를 얻으실 때, 오직 그때만 그분은 자신에게 합당한 충만하고 온전한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의의 또 다른 부분은 의의 전달에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부요함을 결코 자신 안에만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인류에게 부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한, 그분의 의는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향유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우리의 의를 위해 오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려지는 결론은, 하늘로부터 해결책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불의하고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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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 칼빈 주석은 현대 영어판 가운데 권위 있는 미국 Eerdmans 출판사의 파커(T. H. L. Parker) 역본을 정식 계약을 맺어 출간하였으며, 성경 본문을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명확하게 연구하여 설교하기를 원하는 목회자, 신구약 석의를 분명한 신학적 토대하에서 건실히 연구하기를 원하는 신학생, 성경공부를 깊이 하기를 원하는 평신도 모두에게 적합한 주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