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4장 19-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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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19-22


19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우리는 이 어구에서 부정어를 하나 없앰으로써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그는 믿음이 약해졌지만 자기 자신의 몸을 죽은 것같이 생각하지 않고” 그러나 이렇게 풀이해도 이 구절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바울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는 것을 방해했을 수도 있고 그로 하여금 완전히 약속을 받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던 그 상황을 좀더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라로부터 이삭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자연 이치에 따라 생식 능력을 잃어버리고 사라 또한 임신할 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자기 자신이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에게 보이는 것은 그 약속의 성취와는 반대되는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진리에 길을 내주기 위해서 자기의 변변치 못한 처지를 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생식 기능이 없는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안 했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식으로 고민했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백세나 된 남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날까? 또 사라는 아흔이 되었는데 아이를 낳게 될까?”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생각을 내려놓고 자기의 판단을 주님께 맡겼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가 ‘자기 자신의 몸을 죽은 것같이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밀려드는 명백한 사실들에서 마음을 돌린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들을 전혀 숙고하지 않았다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음이 견고하다는 표시이다.

이 구절과 창세기 17, 18장은, 주님의 복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의 몸은 이미 나이 때문에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점을 꽤 분명하게 입증한다. 그러므로 사라에게만 장애가 있었다고 어딘가에서 진술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인정할 수가 없다.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이런 해석을 의지하도록 만든 어처구니없는 반론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는 백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생식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에게서 많은 자녀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역사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좀더 충분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전에는 마르고 시든 나무 같았던 아브라함이 하늘의 복으로 말미암아 기력을 되찾았을 때, 그는 이삭을 얻을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마치 정력이 왕성한 나이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나중에 다른 후손들을 낳을 수도 있게 되었다.

사람이 그 나이에 자녀를 낳는 것이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불가사의한 것이 아님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평생에 걸쳐 아브라함을 지치게 만든 고생과 슬픔과 방랑과 고민이 얼마나 많았는지 또한 생각해보라.

그가 자기 나이 때문에 기력이 쇠해진 것 못지않게 그 고생으로 말미암아서도 지치고 기진맥진하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그의 몸 자체가 원래부터 생식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젊었을 때와 비교해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인생의 절정에서 정력이 왕성한 때 생산 능력이 없던 사람이 그 기력이 쇠해진 지금에서야 생산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 같지는 않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은, 우리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 있을 때 믿음이 약해지는 것과 달리 아브라함은 마음이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믿음에는 이중의 약점이 있다. 하나는 힘겹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굴복하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에서 떨어져나가게 한다. 다른 하나는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은 믿음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인간의 지성知性이 아무리 많이 계발되었다 해도 여전히 무지한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인간의 심지心志가 아무리 견고해졌다 해도 여전히 많은 의심이 달라붙어 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육신에서 나오는 무지와 의심이라는 악과 계속해서 싸우게 된다.

이 싸움을 하면서 그들의 믿음은 때로 심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국 떨쳐 일어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고, 그들은 믿음이 약한 중에서도 강건하였노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번역한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칼빈이 인용한 성경에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에 믿음이 없이 흔들리지 않았다’(Looking unto the promise of God, he wavered not through unbelief)라고 되어 있다 – 역자 주].

이 번역이 벌게이트역(Vulgate, ‘벌게이트’는 ‘대중적인’이라는 뜻이며, 벌게이트역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로마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리킴. 제롬이 390~404년에 걸쳐 번역했으며, 이후 약 1000년 동안 기독교 교회에서 공식적인 경전으로 인정을 받음)이나 에라스무스의 번역과는 다르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주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지 어떤지를 보려고 약속에 대한 증거와 자신의 불신앙을 저울질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떤 주제를 제대로 탐구한다는 것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그것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것이며, 그럴듯하게 보이는 어떤 것도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고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가 자기에게 전해준 소식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게 될지 그에게 물었던 것처럼,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다른 사례들에서처럼,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자가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한 메시지가 성도들에게 주어질 때, 그리고 그 일이 너무도 크고 엄청나서 그들의 이해를 뛰어넘을 때, 그들은 경이감에서 나오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들의 경이감은 곧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메시지를 살필 때 그것을 비웃으면서 허구라고 여겨 거부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는지 유대인들이 그분께 물었을 때가 바로 이 경우이다.

아브라함이 웃음을 터뜨리고 어떻게 백세나 된 남자와 아흔이 된 여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책망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이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라 쪽에서 이와 비슷한 웃음을 터뜨리고 질문을 던졌을 때는 책망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비현실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을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용한다면, 아브라함의 칭의와 이방인들의 칭의가 정확히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해서 불합리하다고 강하게 항의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조상을 모욕하는 셈이 된다. 또한 우리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에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썩지 아니함을 약속하시지만, 우리는 부패와 타락에 둘러싸여 있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고 선언하시지만, 우리는 죄로 온통 뒤덮여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호의적이라고 증거하시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징후를 보면 그분의 진노가 곧 닥칠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눈을 감고 우리 자신과 우리와 연결된 모든 것들을 무시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진실하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이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바울이 말한 앞의 문장과 같은 의미로서, 그가 지조 있고 확고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불신앙을 극복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고 거기에서 힘을 얻는 사람만 불신앙과의 싸움에서 승리자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바울이 덧붙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임을 주목해야 한다.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거나 그분의 말씀이 가진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은 그분께 가장 큰 모욕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 신앙은 믿음에서 시작된다.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어떤 비범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만큼 하기 어려운 일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든 방해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이 그분의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아주 작은 시련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우리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다. 내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면 우리는 곧바로 그분의 능력을 깎아내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서 그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장애물이 나타날 때 이렇게 마음먹어야 한다.

“구름을 흩어지게 하는 데 태양의 강한 광선이 필요한 것처럼, 세상의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자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다고 해서 그분의 능력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늘 변명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행하실 수 있는 것 이상을 말씀으로 약속하신다고 생각한다(이는 틀린 생각이며, 분명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실이어서 우리가 주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충분히 높여드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연약함과 곤궁함과 결점들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온전히 주목해야 한다. 만일 믿음이 우리의 의나 존귀함에 달려 있다면, 그 믿음은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는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주님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불신앙의 증거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앉아서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그분의 능력을 주시하며, 특별히 그분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에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이룰 준비를 갖추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여기 나오는 관계사를 남성형으로 간주하고 싶어 한 것이 내게는 이상하게 생각된다.

남성형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 내가 알기로 여기 사용된 ‘약속하다’라는 동사는 수동형이다. 그러나 번역할 때 약간의 변화를 주었더라면 표현이 좀더 자연스러워졌을 것이다.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왜 그리고 어떻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를 얻게 해주었는지 이제 좀더 분명해진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과 말씀간의 이 관계를 잘 이해해서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것이 말씀에서 받은 것만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대략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식만 가지고서 하나님이 진실하다는 결론에 이른 사람은 곧바로 의롭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을 확실하게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럴 것이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3-25


23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앞에서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하나의 실례에서 나온 증거가 항상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진술이 문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의에 대한 실례가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단언한다. 이 구절은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모범을 통해 유익을 구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세상의 저술가들이 말한 대로 역사는 인생의 스승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저술가들이 우리에게 역사를 기록해서 전해주었을 때,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 확실한 성장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우선 성경은 일반적인 규범을 제시해줌으로써 우리로 다른 역사를 분석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결국 그 역사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경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지 분명하게 구별해준다.

그러나 그 특별한 영역인 교리에 관한 한, 성경은 다음과 같은 독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성경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그리고 사악한 자들에 대한 그분의 심판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그의 생애가 기록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기록은 한 특정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부르심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얻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놓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유일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며 만인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의를 얻는 이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역사를 올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 역사를 통해 건전한 교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함을 기억하자.

그 거룩한 역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어떻게 믿음을 견고하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가 성경 인물들에게서 깨어 있는 마음과 신앙의 정조와 사랑과 인내와 겸손함과 세상에 대한 경멸과 다른 미덕들을 배운다면, 그들의 본은 우리의 삶을 질서 잡히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나 그들과 함께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들에게 베푸신 그분의 보호하심과 아버지로서의 돌봄은 우리가 역경 중에 있을 때 위로를 줄 것이다. 우리에게 경외심을 불어넣어서 그분을 공경하게 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한다면, 사악한 자들에게 가해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또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라고 진술함으로써 그는 그 기록이 부분적으로는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해석자들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은 그를 칭송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한다.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이 영원토록 기억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잠 10:7). 그러나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좀더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만일 그 내용이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모범으로 제시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어떤 유일한 특권에 대한 언급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도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하므로, 그 기록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한 의미가 될 것이다.


24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앞에서 나는 바울이 삽입한 완곡한 표현들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 독자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 믿음의 본질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는 본문의 흐름에 맞게 이런 표현들을 끼워넣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본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은 내세에 대한 우리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런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하나님을 믿는 자니라’라고 했더라면, 어떻게 그분의 부활이 의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분 자신의 부활로써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분명한 징표를 주실 때, 우리는 의의 전가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25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그는 내가 방금 언급한 교리를 아주 상세하게 부연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 우리의 구원을 다룰 때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만 자세히 설명한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즉, 그는 우리 구원의 원인에 대해 좀더 분명한 설명을 하고자 마음먹고 구원을 이루는 두 요소를 언급한다.

첫째는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속함을 얻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의가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소유할 때 온전한 의를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부분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해서 언급함으로써 바울이 무지한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쪽으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이 다음 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줄 테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으로 보여주신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가 얻어진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루셨는지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그분의 부활하심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구분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죄를 속해준 그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결국 그분의 부활로 완성되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다.

의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고, 의의 완성은 사망이 멸망당함으로 생명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의도한 바는 우리의 죄에 대한 속함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의 죄를 멸하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을 그분이 우리 대신 받으심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사 53:5)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분이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내줌이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속죄는 이런 화목의 길을 택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한 뜻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이기시고 승리자로 떠오르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하늘 영광 가운데 들어가셔서 자신의 중재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스스로를 내어드리고 우리의 죄에 합당한 저주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을 이긴 칭의의 능력은 그분의 부활 덕분이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십자가의 희생이 우리의 칭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의 온전함이 그분의 부활 생명을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하반절의 의미가 삶이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아직 그 주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반절이나 하반절은 동일한 것을 가리키고 있음 또한 확실하다.

만일 칭의가 삶의 혁신을 의미한다면, 우리의 죄를 위한 그분의 죽음 또한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분이 우리로 육신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얻게 해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견해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바울이 말한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의 재앙에서 건져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그가 말한 것은, 그분이 자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온전히 회복시켜주셨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몸으로(in persona peccatoris) 죄의 비참한 상태를 견디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에 맞으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의와 생명을 값없이 주시기 위해서 생명의 나라로 의기양양하게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전가轉嫁된 의에 대해서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의 본문이 이를 확증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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