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죽으면 그만일까? : 죄의 결과인 죽음 – 김동호 크리스천베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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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구원 얻기 위해서 믿는데, 구원이라는 말을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한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잘 사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도 잘 사는 것이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잘 사는 것인데, 정작 스스로를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행복, 즉 잘 사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그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인가

행복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그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얻지 못해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 아니므로 그것을 얻지 못한 것이 곧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여 결국 평생 자신은 행복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살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과연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져야만 한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못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 많은 부자를 흔히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기준을 돈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못 살고 불행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돈만 가지고 잘 살고 못 사는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만일 돈이 많은 것이 잘 사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예수를 잘 믿는 모든 사람을 다 부자가 되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는 사람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예수를 전혀 믿지 않고 사는 사람 중에도 부자가 있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돈이 많은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a 않으시는 것이 분명하다.

돈은 축복이 아니다. 돈은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축복이 아니라 은사이다. 돈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축복이라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축복을 받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도 가난할 수 있고 예수를 믿지 않아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돈 자체가 축복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은 은사이다. 은사는 믿는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다. 방언은 은사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다 방언을 받는 것은 아니다. 돈은 방언과 같은 은사이다. 축복은 원칙적으로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지만, 은사는 원칙적으로 쓰라고 주시는 것이다. 돈을 은사로 하나님께 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돈을 축복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는 없다. 돈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이 없는 것을 못 사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돈이 없는 것은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것이다. 못 사는 이유를 가난에서 찾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잘 사는 법을 찾아낼 수 없다.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못 사는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못 사는 이유를 성경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가장 정확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못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실패하고 못 사는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죄의 삯을 사망(롬 6:23)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망, 즉 사람이 못 살고 실패하는 이유가 죄에 있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너무 간단하게 단정되어 있어서 오히려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죄가 모든 못 사는 삶의 뿌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사망이 역사하는 까닭은 죄 때문이다. 죄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우리는 구원과 같은 신앙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것이 아니다. 죄 때문에 못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만 없다면 지금 이대로도 얼마든지 천국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보다 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돈의 문제를 해결할 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 관계의 단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하였는데도 그 즉시로 호흡이 끊어져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의 실상이 다섯 가지 사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다.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즐거워하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결국에는 관계가 단절됐다.

물론 인간의 범죄 이후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줄을 끊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줄이 끊어진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둘째,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아담과 하와, 즉 인간 서로 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아주 아름다운 관계였다. 하와를 보고 아담이 한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말 속에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였는가를 알 수 있고, 저들이 그러한 인간관계 속에서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한 후 이 소중한 인간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범죄한 후 아담은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선악과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여자 그가 내게 주어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든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하며 ‘그 여자’라고 부를 때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이미 그전과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과 ‘그 여자 때문’이라는 말 사이에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차이가 바로 죄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창세기 11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벌은 ‘흩어짐’이었다. 그 전까지 저들의 언어는 하나였으나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저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됨으로 저들 서로 간의 삶에 벽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함께 살 수 없어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담이 있어 다들 늘 외로워하며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모든 원인이 죄 때문인 것이다. 죄는 사람들 간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제가 아닌 경쟁 상대로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서로 피나는 투쟁과 경쟁을 하면서 외롭게, 그리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다.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셋째, 범죄 이후 인간은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살았으나 서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나 범죄한 후 저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아 자신을 가렸다. 드러내놓고 보여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죄가 없을 때 사람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로서의 삶을 산다. 그러나 죄를 지을 때 사람은 누구 앞에도 떳떳하게 설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어떤 여 집사님의 남편이 부흥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고 거듭나게 되었다. 정말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모든 잘못과 죄를 회개하고 정리하면서 과거 6년 동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 동거생활을 하며 여섯 살짜리 아이까지 두었다는 사실을 부인에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다. 부인은 참으로 힘들었지만 힘써 기도함으로 남편을 용서해줄 수 있게 되었다.

남편도 그 잘못된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동안 동거생활을 해오던 여인은 잘 정리하고 그 여자가 낳은 아이는 자기 호적에 새로이 입적하여 본집에 데려오게 되었다. 아이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가족들이 다 이해해주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은 다 큰 자식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일찍 집을 나섰고, 아이들이 잠든 후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고역을 상당히 오랫동안 치러야만 했다.

바로 이것이 무서운 ‘죄의 삯’이다. 자식에 대한 아비의 면목은 생명과 같다. 그런데 죄가 그 생명과도 같은 아비의 면목을 앗아가버렸다. 한순간에 자식을 훈계하고 가르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식 앞에 수치스러운 아비가 된다는 것은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다.

나에게서 생명처럼, 아니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면, 내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며 많은 교인의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늘 사랑받는 남편이고 싶고 아이들과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와 목사이고 싶다. 실제로 나는 그들에게 거의 그런 존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여주시고 도말하여주시지 아니하여 그 죄 중 십 분의 일, 아니 백 분의 일만이라도 드러나게 된다면 나는 나의 그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만큼 죄는 무서운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놀랍고 감사하다.

우리가 못 사는 단 하나의 이유

넷째, 죄의 유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세상에 천하보다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생명이다. 그러나 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이다. 정말 자식은 천하보다 귀하고 내 생명보다 귀한 존재이다. 그런데 죄는 그 생명보다 귀한 자녀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장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엄청난 죄의 뿌리를 캐보면, 그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온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교육 전문가들이 흔히 하는 말들이 있다. 그것은 “문제아는 없다. 다만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다. 죄의 영향력이 자신에게서만 그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식에게까지 그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점에서 죄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무섭다.

다섯째, 고통과 고생을 인간에게 안겨주게 되었다.

범죄한 후 하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벌로 받게 되었으며,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먹게 되는 고생을 벌로 받게 되었다. 현대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여인들은 무통분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남자가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고통과 고생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여인의 해산과 남자들의 땀 흘림은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겪어야 할 모든 고통과 고생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고생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고해라고 한다. 그 모든 고생과 고통의 원인이 죄에 있다. 죄가 없다면 고생도 없다. 죄가 없다면 고통도 없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고 자명한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볼 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우리가 못 사는 단 하나의 이유는 죄 때문이다.

길을 막아선 사람들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리라고 생각했던 길이 막혀서 세 시간이 넘게 걸려 목적지에 도착한 적이 있다. 고속도로상에 큰 교통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그날 사고를 일으킨 한 사람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그 자신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그들 가운데는 분명히 정한 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고 때문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은 사람도 생겼을는지 모른다.

교통사고와 같은 실수와 잘못이 길을 막아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듯, 크고 작은 죄악들이 사회의 길을 막아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죄의 특성은 길을 막는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길이 막힌다는 것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감을 가져다주는데, 그 절망감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키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는데, 그 절망의 뿌리가 바로 죄이다.

정부와 민간이 합작하여 만든 회사에 근무하는 한 분을 알고 있다. 한국의 최고 명문대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30년 이상을 한 직장에 근무하는 분이다. 그런데 그 직장은 다른 직장에 비하여 진급이 참으로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그 분도 직장에 입사한 지 20년이 넘어 나이 오십이 넘도록 과장이었고, 그 후 겨우 부장으로 승진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참으로 성실하고 유능하고 정직한 분으로, 그 분이 직장에서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공정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분이 과장이었을 때 나는 그 분에게 “아직도 과장이시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 분은 자신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라고 대답했다.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근무 연수도 많은 사람 중에 아직 과장도 못 된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그 분은 그 직장이 그렇게 진급이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낙하산 인사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의 낙하산 인사는 이해해줄 수도 있겠는데, 지나친 낙하산 인사 때문에 정상적으로 승진해야 할 사람들의 길이 막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회사 복도에서 그 분보다 선배인 분으로 아직 과장도 되지 못한 분을 만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인사차 물었더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아직 미치진 않았습니다” 하더라고 한다. 그 분은 이런 모습이 그 회사 전체적인 분위기라고 했다. 몇몇 사람들의 부정한 인사가 정당한 승진의 길을 막고, 그 길 막힘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희망을 앗아가 하루하루를 절망감 속에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작은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유형의 삶이 이 세상의 모습을 대변하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사람들의 죄악들이 이 길 저 길을 모두 막아버리고 있다. 사람들은 길을 뚫기 위하여 편법을 쓴다. 그러나 그것이 또 길을 막는 요인이 되어 이 세상은 이리저리 길이 얽히고설켜서 다수의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다.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역할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

마음이 깨끗해야 보인다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정견’(正見)과 ‘선견’(先見)이다. 앞서 보고, 정확히 보는 것만큼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중요한 것은 없다. 그 밖의 다른 여건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판단이 정확지 않고 또 판단의 속도가 느려서 남이 다 본 후에야 그것을 보게 된다면, 그는 절대로 성공하거나 승리할 수 없다.

그런데 삶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데 그토록 중요한 정견과 선견은 무엇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돈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인다 해도 돈으로 그것을 얻을 수는 없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는 않다. 정견과 선견의 사람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욕심 없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갖게 될 때 정견과 선견의 축복을 받게 된다.

학교 다닐 때 바둑을 조금 두어본 적이 있다. 한 10급 정도밖에 안 되는 엉터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가 직접 바둑을 둘 때는 10급 실력밖에 안 되는데 남의 바둑을 훈수할 때는 8급 실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나 다 그렇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내 바둑을 둘 때는 꼭 이겨야만 한다는 승부욕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승부에 대한 욕심이 우리 눈을 어둡게 하여 당연히 볼 수 있는 수를 보지 못하고 실수한다. 그러나 남의 바둑을 훈수할 때는 승부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욕심이 없어지면 눈이 밝아지게 된다. 마땅히 볼 수 있는 수가 다 보여 실력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욕심에 눈이 먼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정답이다. 욕심, 즉 죄가 우리 눈을 어둡게 하여 우리에게서 생명처럼 소중한 정견과 선견의 능력을 앗아간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나님까지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수가 보이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그는 늘 승리할 수밖에 없다. 성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죄와 욕심으로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소중한 정견과 선견의 능력을 빼앗겨버린다. 그래서 밤낮 오판하고 밤낮 악수(惡手)를 두게 된다. 그러니 성공과 승리는 고사하고 생명을 바로 부지하기도 어려워진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

거룩함이 능력이다

많은 나라를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다녀본 나라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나라를 꼽으라면 영국을 꼽고 싶다. 왠지 나라가 품위 있어 보이는 것이 아마 내 개인적인 취향과도 맞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국이 앞으로 21세기의 세계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지도력을 가진 나라가 되기는 어려우리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후배 목사님 한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어느 날 그 분과 함께 길을 가다가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그 후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저 아이들 중에 양부모가 다 진짜 자기 엄마 아빠인 아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영국도 성적으로 이미 매우 문란해져 이혼율이 높아지게 되었지요. 이로 인한 가정 파괴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와 있는지 모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영국에 대한 내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로는 21세기의 주역으로 나설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프라미스 키퍼’(Promise-Keepers)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남편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정결치 못했던 삶을 눈물로 회개하고 앞으로 영육 간에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1997년에는 수도 워싱턴 DC에서 백만 명의 남자들이 모여서 집회를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운동을 지켜보면서 거룩함과 깨끗함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운동이 확산되어 미국이 정말 거룩함과 깨끗함의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면, 미국은 앞으로도 계속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강국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거룩함과 깨끗함이 능력이다. 그 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그런데 죄가 우리에게서 그 소중한 생명의 능력을 앗아가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

까마귀발로는 천국 못 간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한 어린아이가 저녁 시간에 다음 날 새벽에 어딜 함께 가자는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서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도망을 갔다. 잠을 자지 않고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든 틈을 타서 화장실에 가 몰래 발을 씻었다. 왜냐하면 아빠가 다음 날 새벽에 목욕탕에 함께 가자고 했는데, 그 아이의 발은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씻지를 않아서 까마귀발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발이 더러웠지만 그동안은 별문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양말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발이 까마귀발인지 백조 발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빠가 목욕탕에 가자는 말을 했을 때, 그 아이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양말을 신고 목욕탕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간 자기의 수치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 아빠가 내일 새벽에 목욕탕에 가자고 미리 이야기를 했기 망정이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는 아이를 깨워 목욕탕으로 데려가려고 했다면 그 아이는 분명 중간에 도망쳤을 것이다. 그 까마귀발을 하고 목욕탕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발로 아버지랑 같이 목욕탕에 들어갈 수 없듯이, 우리의 더러운 죄를 가지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는 더더욱 없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 죄가 양말 속의 발처럼 숨겨질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햇빛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빛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나님이 제지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도망가게 될 것이다. 부끄러운 죄를 가지고 천국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될는지 모른다.

죄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실패하게 하고 패배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까지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죄를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

우리는 이제까지 여러 측면에서 죄가 우리 삶에 끼치는 심각한 영향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를 짓고 산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속이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죄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평생 그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 그 죄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 당신의 마음과 삶 속에 기쁨이 없다면, 그 삶 가운데 평안함이 없다면 그 이유는 세상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이 무겁고 힘들어질 때마다, 삶이 메말라 무미건조해질 때마다 우리는 자신에게 숨어 있는 죄를 생각해야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가난과 어려운 환경과 여건이 우리를 못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죄가 우리를 못 살게 하고 있다. 죄 때문에 못 사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크리스천 베이직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서술한 책이다.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조직신학적인 공부가 한 번은 꼭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균형 잡힌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둥과 뼈대를 세우지 않고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튼튼하고 반듯한 신앙생활이 어려워진다. _ 개정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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