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함이 아니라 연약함이다 – 유기성 영성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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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도사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참 탁월 (말씀을 해석하시는 능력, 전달하시는 일,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안목 등)하신데, 탁월함을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탁월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평범한 아이였고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아니 연약하다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저도 탁월한 사람들이 부러웠고 탁월한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약하면 죽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탁월함은 배워서 되는 것도,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님을 알고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약한 자, 미련한 자, 없는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를 택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읽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안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도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택하신다는 것은 믿기로 결단하고, 그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날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울 일인지 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아가 죽어야 하는 일임은 분명히 깨달아졌습니다.

그 후부터 제가 약한 자라는 것이 감사하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쓰신다면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제게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다 제거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의 종이 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장애물이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계속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탁월함이 아니라 “연약함”이었습니다.

제 연약함의 하나는 마음의 상처가 많은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겪은 교회 안의 모순과 거짓, 교만, 분열과 다툼으로 인한 상처가 컸습니다. 그러한 상처는 목회자가 되기에 큰 결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상처들이 제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목회하면서 무엇 하나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예배드리는 것 하나만 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들이 은혜 받고 가게하고 싶었습니다. 예배드리러 왔다가 은혜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마음이 어떠한지 너무나 아프게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목사들과 함께 설교하기 전 반드시 설교 크리틱을 받고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설교의 탁월함이 없다면 성실하게 준비한 설교라도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저는 선포형의 설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수없는 선포형 설교를 들었지만 제 마음 안에 끊임없이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이 설교는 진짜일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실제로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있나?” “설교자는 그렇게 살고 있을까?”

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성경 말씀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설교를 제가 해야 하니,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갈등과 내적인 싸움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 몸부림으로 오늘까지 왔습니다.

이런 연약함과 마음의 상처가 저를 ‘오직 주님’이 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주의 종은 탁월하지 않아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만 분명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예수님의 생명이 저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24 시간 예수를 바라보자’,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 ‘한 시간 기도 운동’ ‘예수동행 운동’ 이 제 목회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저와 제 아내가 얼마나 연약하며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 때마다 잠깐 휘청하기도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은혜의 순간임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약하니 오직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연약함이 감사가 되었고 오히려 자랑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함은 두려워하거나 좌절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만 바라보게 해주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임마누엘의 은혜는 탁월함 보다 연약함을 통하여 흐르고 마음의 상처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