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넘쳐나는 아이들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서 등교하던 시절이었다. 일 학년 오후반이었던 어느 날,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는데 엄마가 말씀하셨다.

우리 에스더, 크레파스 사줘야겠네.”

내가 미술 시간에 쓰던 크레파스는 오빠 셋이 쓰던 걸 그대로 물려받은 거였다. 오빠들이 얼마나 험하게 썼는지 대부분 몽땅해진 데다가 크레파스는 새까맣게 때가 타서 무슨 색인지 바로 알기도 힘들었다. 크레파스를 보관하는 케이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비닐 봉투만 남아서 거기에 대충 담아서 들고 다녔다. 그러나 엄마가 일러주기 전까지 나는 새 크레파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혼자 학교에 가는데 손에 들린 크레파스에 자꾸만 눈이 갔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형편을 엄마가 먼저 알아봐준 게 고마웠고, 내 손 아래 흔들거리는 새까만 몽당 크레파스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 어린 시절에 해질 때까지 교회 마당이나 골목에서 같이 뛰놀던 언니, 동생, 친구들이 있었다. 어쩌다 그들의 집에 놀러 가보면 사는 모습이 다 달랐다. 우리 집보다 작은 집은 아늑해서 좋았고, 더 큰 집에 가면 내오는 간식을 신나게 먹으며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재미있었다. 나는 이런 차이를 요즘 아이들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어릴 때의 이런 무던한 성격으로 쭉 자랐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자랄수록 부러운 것이 많이 생겼다. 내게 없는 것, 가지지 못 하는 것들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느라 가슴이 아팠다. 속이 상했다. 다 커서 만난 이 감정에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잘한 것은 급한 대로 꿀꺽꿀꺽 삼켰지만 도저히 못 삼키는 것도 있었다. 잠깐 냉정을 잃을 정도로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그때마다 부러운 것도 견디기 힘든데 꼭 죄책감이 같이 따라왔다.

‘다른 사람의 행운과 행복에 진심으로 축하는 못할망정 심사가 뒤틀려서 심술을 내는 너는 나쁜 사람’이라고, 내 이성이 감정을, 머리가 가슴을 신랄하게 정죄했다.

가질 수도 없는데 부러워도 못 하다니….

주일이면 목사님은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자주 설교하셨다. 하나님이 내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걸 믿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라고 하셨다.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빌 4:12). 그때마다 나는 꼭 혼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대놓고 신세타령을 하지 않았는데도 참지 못하고 감추지 않고 부러워했다고 아빠 엄마의 얼굴에 잠깐 스친 어이없다는 표정을 읽은 날, 참 섭섭했다. “우리는 네게 그렇게 못 해준다”라는 소리로 들렸다. 네가 더 노력해서 네 힘으로 얻으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남을 부러워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가. 내가 빼앗아 달라고 했나, 훔쳐 달라고 했나. 그저 부러웠을 뿐이고 그 마음을 달래느라 힘들었는데, 아무도 몰라주니 내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공감과 위로만 있었어도 견디기 쉽지 않았을까. 나 스스로 해명하고 달래려니까 외롭고 비참했다. 길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나 혼자 조용히 쳐다보며 부러워하던 순간들. 하나님께 달라고 하기에는 그것이 거룩하지 않아서 기도도 안 나오던 것들. 그런 시간을 지나 나이 오십이 된 지금 뒤돌아보면,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내가 어딜 그렇게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찾아보신 것 같다. “저거?”라고 하시면서.

내가 느낀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이름 앞에 붙는 수많은 표현이 다 좋지만 떠올리고 불러볼 때마다 가슴 뭉클한 이름은 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내 결핍을 아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으로 다가오셨다. 그때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대신 집어서 수줍은 내 손에 아무도 몰래 꼭 쥐여주셨다.

어느덧 내게 와 있던 선물들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려서 와도, 생각지 못하게 일찍 와도 ‘어쩌다 왔겠지’ 하고 오해하지 않는다. 내 소원은 선명했고, 도착한 선물은 딱 내 소원만큼이었으니까.

서러운 시간은 지나갔다.

하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나님은 내 이야기를, 순전히 내 입장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내 마음과 진심을 아시기에 기도가 짧게 끝날 때도 있지만, 내 마음을 아시기에 오래오래 그분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을 만날 때는? 뭐, 괜찮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내 마음을 몰라주면 안 되는 사람이 모르는 것 같을 때, 사랑의 하나님을 잘 몰랐을 때는 너무너무 섭섭해서 화가 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하지만 이젠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지 않은가. 내 마음을 잘 얘기하면 다들 잘 받아들인다. 더 이상 벽이 생기지 않는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도,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집착도 내려놓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알고부터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 이미 배가 부르고 주머니는 두둑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해도 상관없다.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지.

속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어렸을 때 혼나는 것 같은 기분으로 배웠던 ‘일체의 비결’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셨다. 그의 복잡한 심정을 예수님은 아셨다.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을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질문하신다(요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반복해서 받은 베드로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한다(요 21:17).

부인하고 저주했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내 마음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고백하는 이 순간. 이 사랑이라는 말에 후회도 통곡도 부끄러움도 자책도 환멸도 경멸도 묻고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옛사람의 모든 것을 묻고 그는 다시 태어난다.

베드로를 아신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이 질문으로 그를 살려내셨다. ‘부러움’이란 감정에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묻는다.

안 부러워?

아이들은 ‘그래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니요.

그래, 아직 오지 않았구나. 하지만 언젠가 그런 일을 만나게 될 거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부러운 일들이 네 인생에도 생길 거야. 그러나 그때 길까지 잃어버리지는 말아라.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시란다.

† 말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갈라디아서 4장 6절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 시편 139편 9, 10절 

† 기도
하나님,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서, 너무 부러워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쳐다보던 그 순간, 제 옆에서 저를 보고 계셨군요. 그리고 몰래 제 손에 쥐어주시며 저의 마음을 헤아려주셨는데 저는 그걸 잘 몰랐어요. 감사해요. 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제는 전전긍긍하지 않겠어요. 어떤 순간이 와도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심을 잊지 않겠어요.

적용과 결단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내 마음, 꼭꼭 숨기고 싶을 정도로 부러워서 질투나는 마음… 모두 하나님이 알고 계세요. 그리고 그 마음을 헤아려주시기도 하고, 슬쩍 내 손에 쥐어주기도 한다는 사실,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모든 순간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고 안내하신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당신을 되길 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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