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에게는 질문이 있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진짜로 답이 필요해서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영생 얻는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뒤이어 등장하는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그는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신앙적인 자부심도 대단했다. 스스로 모든 율법을 지켰다는 이 청년의 질문은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벽함을 나타내는 것에 더 가까웠다. 이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이 말씀 앞에 부자 청년의 자부심은 무너져내렸다. 재물이 많았던 그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좋은 씨앗 같았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 마 13:22

완벽을 자랑하던 청년은 꽁무니를 감췄다. 그는 분명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따를 수가 없었다. 재물에 대한 근심 때문이었다. 사람은 사랑하는 것에 복종하게 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께 복종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요 14:21). 근심은 예수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돈과 악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딤전 6:10

부자 청년의 근심 출처를 정확히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는 단순히 재물이 많음으로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많은 돈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용할 수 없는 ‘근심’이 문제였다. 그리고 근심의 배후에는 ‘자기 의’와 동시에 ‘돈을 사랑함’이 작용하고 있었다.

부자 청년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이를 지적하시며 제자들과 대화를 이어가셨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그들은 일단 몹시 놀랐다. 누가 봐도 천국에 갈 것만 같은 부자 청년이 천국에 가기 어렵다면, 자신들은 더 힘들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기서 하나 알아두어야 할 배경지식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구원과 부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율법을 모두 지키면 구원받는다’라는 식의 ‘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중성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가장 거룩하시며, 어느 누구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리 지식을 따르지 않고 경험을 따랐다. 통념상의 ‘자기 의’를 더 추구했다.

한편, 구약 백성에게 많은 재물은 곧 하나님의 복을 의미했다. 욥기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은 곧 그에게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친구들은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들의 대화를 읽어나가다 보면 ‘부는 곧 복’이라는 생각이 그 배경에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언에서도 그렇다. 부자의 특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의인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복의 이유는 내가 복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통념 속에서 제자들도 무의식적으로 부자 청년을 우러러봤던 것 같다. 그 청년 정도라면 구원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5)

제자들의 눈에도 구원의 기준은 예수님이 아니었다. 당시의 통념에 비추어보자면, “부자 청년 같은 사람, 의인이며 복받은 존재도 구원을 못 받는다면 대체 누가 구원받는단 말입니까?”라는 질문이었다. 그들 역시 부자 청년만큼이나 재물에 막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부자 청년 이야기의 전체 맥락은 ‘구원’이다. 부나 가난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자부심도 마찬가지다. 사실 무엇으로든, 사람이 구원을 얻어내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부자 청년이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랑을 파괴하는 사례는 다반사다. 이런 대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이야, 나야? 선택해!”

어떤 가장이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하자. 그 자체로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가정은 뒷전이고 매일 일에만 빠져 사는 가장이 있다면, 그는 가족 사랑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진부한 이야기다. 문제는 ‘돈을 어떻게 버는가?’가 아니라, ‘왜 버는가?’에 있다. 거기에는 옳은 목적과 그른 목적이 있다. 만일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가 가족은 모르겠고 저 혼자 여행 다니고 호화롭게 쇼핑이나 하기 위함이라면, 옳은 목적이 아니다.

가족을 사랑해서 돈을 버는 것은 아름답지만, 돈을 사랑하여 일하면서 가족 핑계를 대는 건 추하다. 행위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해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었다, 송준기

† 말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디모데전서 6장 10절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디모데전서 6장 17절

† 기도
주님, 재물 때문에 염려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무엇에 가중 큰 관심을 투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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