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돈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우상 숭배의 증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탐심, 근심, 염려가 이들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다른 말인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다(골 3:5). 그리고 ‘근심’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결과다(딤전 6:10). 또한 예수님은 돈을 사랑함으로 ‘염려’하는 태도를 우상 숭배와 동일시하셨다(마 6:19-34). 이들 셋은 돈을 사랑함과 연결된 마음의 상태들을 잘 보여준다.

반대로 탐심, 근심, 염려가 있다면 맘몬을 숭배하고 있는 상태는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염려에 대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출애굽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 출 32: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염려를 반복했다. 출발 직후 맞닥뜨린 홍해 앞에서부터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도, 여정에 지쳤을 때도 염려로 일관했다(출 14:11; 16:3; 17:3; 민 21:5).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염려 역시 우상 숭배다. 광야의 백성이 불확실성 앞에서 선택한 것은 매번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충분히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염려를 선택했다. 하나님보다 염려를 더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난은 거룩과 동의어가 아니다. 가난해도 돈에 대한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우상 숭배와 직결된다.

지폐를 한 장 꺼내보라. 천 원, 만 원, 어떤 액수라도 상관 없다. 그리고 잠시 쳐다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아니, 얼마짜리로 보이는가? 똑같은 만 원짜리 지폐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가격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길 가다 주운 것과 직접 땀 흘려 일해서 번 만 원은 전혀 다른 가치로 보이기 마련이다.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가치 있게 사용할 것이다.

어떤 돈이든 소유자의 심리적 가치 판단이 들어간다. 쓰임새는 그 뒤를 따른다. 돈은 그저 돈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종잇조각일 뿐이다. 다만 당신이 거기에 가치를 부여했을 때 값이 생기고 어떻게 쓸 지가 결정된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우상 숭배와 염려의 관계를 보여주셨다(마 6:19-34).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돈이 언제 보물이 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복음서에는 돈을 직접 언급하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므나, 달란트, 데나리온, 렙돈, 앗사리온, 드라크마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21절에 보면 예수님은 ‘돈’이라는 객관적 표현을 쓰지 않으셨다. 대신 ‘네 보물’이라는 주관적 표현을 쓰셨다. 이것은 돈에 대한 사회적 가치 판단이 아니다. 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당신의(‘네’) 관점(‘보물’)에 대한 말씀이다.

돈이라고 다 같은 돈이 아니다. 마음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어떤 것은 ‘나의 보물’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은 싸구려가 되기도 한다. 마치 물 한 컵과 같다. 사막에서 조난당한 사람에게는 보물이 되고, 배부른 사람에게는 별반 가치 없는 것이 된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지금 손에 든 그 지폐에 당신은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가? 그것은 무엇, 혹은 누구를 위한 돈인가?

‘네 보물’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사원이 최신형 스포츠카를 고가에 구입했다. 그리고 매월 수입의 80퍼센트를 자동차 할부금 갚는 데 지출 중이다. 이때 그가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을 지는 뻔하다. 기회비용을 생각해볼 때, 새 차가 ‘그의 보물’이다.

여기 또 다른 상황도 있다. 각각 저녁식사 비용으로 만 원씩 사용한 두 사람이 있다. 그런데 저녁을 먹는 목적이 달랐다. 한 명은 클럽 가서 밤새 놀기 위해, 또 다른 한 명은 산기도 가서 밤새 부르짖어 기도하며 찬양하려고 저녁밥을 먹었다. 두 사람이 사용한 지폐에 인쇄된 액수는 같았다. 그러나 목적은 같지 않았다. 각자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달랐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마 6:21

마태복음 6장에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이 나온다. 내가 돈에 어떤 목적을 두고 쓰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돈을 마음의 문제로 다루신다. 앞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라는 말씀 역시 마음에 대한 명령이었다. 돈에 대한 마음이 목적과 쓰임새를 결정한다. 내 마음이 돈에 ‘하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면, 그 돈은 ‘하늘’에 쌓아두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마태복음 6장에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등장한다(26, 28절). 이들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의 문제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심을 알기 때문이다(26, 30절). 이 비유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염려’라는 행위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한낱 동식물들도 하지 않는 것이 염려다. 문제는 이 어색한 일을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염려는 불신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염려는 믿음의 문제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문화 아래 있었다. 그곳에서 만약 어떤 노예가 의식주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고 다닌다면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주인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 부분을 지적하며 말씀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마 6:30

‘믿음이 작은 자들’은 다른 말로 하자면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 ‘덜 믿음’의 자리를 돈 염려가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그렇게 본다면 돈 염려는 우상 숭배의 한 모습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마 6:24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재물’이라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이를 ‘맘몬’이라고 부르셨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불신해서 돈에 대한 염려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맘몬 숭배다.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었다, 송준기

† 말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마태복음 6장 24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한복음 14장 27절

† 기도
돈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모든 것을 채우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 적용과 결단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대신 염려를 선택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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