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무명이라는 수업을 통해 반드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사실, 모든 순간에 인간만큼 쉽게 오만에 빠지는 존재도 없습니다. 인간만큼 허위라는 강에 흠뻑 빠져 둥둥 떠다니는 존재도 없습니다.

모래알 같은 작은 성취에도 스스로 히말라야를 등반한 것같이 여기기도 하고, 모래집을 짓는 것 같은 부스러기 같은 성실함에도 스스로 만리장성을 쌓은 것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허위와 거짓도 그렇게 잉태합니다. 모두 자기 자신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아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인간보다 오만과 교만에 넘어지는 인간이 몇백 배는 많을 것입니다. 도박에 망하는 사람보다 허영과 허세에 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굳이 성경의 역사를 보지 않더라도, 그대가 사는 세상에는 이렇게 망가지고 부서지는 사람의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휘어져 가는 소식은 매일 업데이트되어, 그대가 쉽게 접하는 SNS에 두둥실 떠다닙니다. 이제는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참 재미있죠?

그런데 성경을 조금 깊게 보면, 이렇게 종이보다 얇고 가벼운 인간의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무섭도록 겸손하고 무서울 만큼 정직하고 무서워서 울 만큼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단 한 조각의 시선도 인간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평가에만 괴로워하는 몸부림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기에,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대에게 엘리사를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 열왕기하 5장 20-25절

이것은 그대가 잘 알고 있는 엘리사의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엘리사는 문둥병으로 온몸이 썩어버린 나아만 장군을 비대면으로 고쳐줍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 기적을 몸소 경험하고 엘리사에게 응당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 모든 것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 나아만 장군이 돌아가는 것도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엘리사의 제자인 게하시가 돌아가는 나아만에게 찾아가 스승이 거절한 선물을 받고 자신의 집에 감춥니다. 게하시는 이 모든 일을 감쪽같이 행합니다. 그리고 다시 엘리사의 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 열왕기하 5장 26절 

그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엘리사가 성령이 충만하다고요? 엘리사가 귀신같다고요? 엘리사가 욕심이 없는 것 같다고요?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겸손>을 느낍니다. 그대가 알고 있는 겸손이라는 정서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겸손은 ‘아나우’입니다. 이 단어는 ‘온유함’이라는 뜻과도 함께 쓰입니다. 이 ‘아나우’는 타고난 인간의 성품을 말하는 겸손이나 온유가 아니라, 어떤 고난에 의해 완성된 인격체, 어떤 훈련과 수업을 통해서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인격체에게 부여되는 성품입니다.

히브리적인 온유함과 겸손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우’의 용례를 야생마가 경주마로 훈련받는 과정에서 훈육의 방법으로 다루는 채찍질로 많이 쓰입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가 경주마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기질이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아나우’는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성품으로서의 겸손함과 온유함을 말합니다. 즉,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이죠.

그대는 엘리사를 보면 또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능력의 종’, ‘불의 종’, ‘성령의 종’ 등등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이지, 그대가 엘리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하는 표현들입니다.

엘리사가 정말 무서운 하나님의 사람인 이유는 그의 성품에 있습니다. 엘리사의 그 성품이 바로 수많은 고난과 훈련을 통과해서 만들어진 겸손함, 즉 ‘아나우’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겸손함, 모든 순간을 압도하는 온유함입니다. 그렇기에 적국의 수장인 나아만 장군 앞에서도, 감히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엘리사의 모든 기적과 이적의 정점에는 그것을 압도하는 그의 성품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런 성품을 갖게 된 것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엘리야의 수종 드는 제자였다는 점입니다.

그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엘리야의 제자로서 <무명>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무명>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마음과 성품이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엘리사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삶의 이유,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대가 갇혀 있는 <무명>의 시간은 분명, 거칠고 아득한 시간입니다. 아슬아슬한 희망의 외줄 타기 속에 지쳐 있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무명, 김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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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 잠언 16장 18~2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시편 51편 10절

† 기도
하나님, 무서울 만큼 정직하고, 무서워서 울 만큼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평가에만 괴로워하는 몸부림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의 자녀 되게 하소서.

적용과 결단
성경이 말하는 히브리어 ‘아나우’의 겸손은 고난에 의해 완성된 인격체, 어떤 훈련과 수업을 통해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인격체에게 부여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역시 엘리야의 수종 드는 제자로 무명의 시간을 보내며 훈련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편에서 반드시 훈련하며 거쳐야 하는 이 시기를 통해 나의 정체성, 삶의 이유, 품위를 지키는 방법을 깨닫고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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