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었는데… 사랑이라고 우겨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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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만큼 줄수 있다고 해서 내 안에 가득 채워 자녀에게 흘려보내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들이 거부하거나 혹은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을때가 많았기에 서운한 맘도 생기곤 했는데.. 나에게 흘러가는 것을 주는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것을 흘려보내야 했던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가장 좋은것은 부모가 주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
대입을 성공적으로 해낸 스무 살 첫 겨울, 그동안 동경하던 청년부 수련회를 떠났다.
청년이 된 큰아들은 눈이 부시도록 멋졌다.

그날, 밤늦게 누워 잘 준비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시간에 오는 전화가 반가운 전화일 리 없다. 청년부 인솔 전도사님이었다.
큰아이가 저녁 집회 전에 쓰러져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왔는데, 그때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의사들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건강하게 자라서 체대생이 된 아이였다.
전도사님이 이어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의사가 ‘과호흡증후군’이 아닐까, 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다시 연락을 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 누운 남편에게 내용을 전하니 그는 듣다 말고 순식간에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남편의 병을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회피였다.
감당할 수 없는 사실 앞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움직인 것이다.
잠이 그를 끌고 어딘가로 가버린 것 같았다.
도대체 과호흡증후군이 뭔지 검색을 시작했다. 이 증상이 남편이 앓는 병과 일맥상통하다는 걸 알고,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어찌할 줄 몰라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엎드려 주님만 부르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큰 소리로 코를 골던, 그러나 단잠을 자는 코골이가 아니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 나보다 먼저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아빠~ 하는 큰아들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남편이 상담을 받기 시작했고 나는 옆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몇 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카테고리별로 정리가 되는 것 같다는 말로 소감을 마쳤다.
우리 부부를 보는 객관적 시각에 대해 듣고 배웠다. 도덕적 기준이 너무 높고, 물로 치자면 맑아도 너무 맑은 사람들이란다.

남편부터 시작한 상담은 나로 이어졌고 큰아이 일이 있고 나서 아이들 모두 각각 검사와 상담을 진행했다. 우리 모두 상당한 수준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가 겪는 세상 풍파를 지켜보며 간접경험을 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조금만 더 있으면 사랑이다, 아니다를 놓고 파국으로 치닫는 막장 드라마를 찍을 예정이었으니 이를 지켜보는 아이들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교회공동체 안에 있었으나 우리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고립감이었다.
아무도 없어서 느끼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감정. 아이들은 집에서도 자신들의 문제에 골몰해있는 부모를 봐야 했다.
엄마가 늘 함께 있었지만 넷 모두에게 요구하는 단체 생활의 총칙만 있을 뿐 아이 각자가 필요로 하는 관심과 돌봄을 줄 줄 몰랐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나,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남편인 것 같았다.
아이들의 문제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자, 나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때였던 것 같다.
사랑이라고 하지 말라,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나를 사랑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발악할 용기가 생긴 건 내가 엄마였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참아주고 있었다. 자아를 찾느라 헤매는 부모를 참아주고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한 채.

기대와 보호라는 이름의 사랑, 걱정과 통제라는 이름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인 사랑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다. 우리가 받은 대로 주고 있던 걸 멈추게 하셨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보내고 있던 신호를 드디어 알아보게 하셨다.

기대와 보호의 뒷면에는 ‘자기식대로’가 따라붙었고, 걱정과 통제의 뒷면에는 ‘의심과 불안’이 있었다. 아이들은 앞면도 사랑이 아님을 알았고 뒷면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우리만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눈에 들어왔던 그날, 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과를 했다.

사랑이 아니었는데
그걸 사랑이라고 우겨서 미안해.
너희들이 받아야 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런 걸 주면서 사랑이라고 우겨서 미안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돌아보니 나는 훈계도 길고 잔소리도 많은 엄마였다.
불안하니까 걱정되니까. 이젠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려고 한다. 입을 닫는 게 몸에 밴 아이들의 마음을 알기 위해.

듣기만 하라고, 따라오기만 하라고, 순종만 하라고 강요받은 아이들에게 이제는 내가 너희들의 이야기를 듣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들의 입과 마음을 열기 위해. 아이들은 얼마나 착한지. 나 같으면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자신을 기만한 인간을 상대조차 안 하련만 그러지 않았다. 벌써 마음의 빗장을 치워 두고 나올 준비부터 하고 있었다.

엄마가 손 내밀어 주기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라진 내 눈빛과 음성에 스르르 다가와 내 무릎에 기대어 엎드렸다. 그동안의 긴장을 풀 듯 그렇게 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주었다.
<사랑하려고 산다>최에스더 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