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 대한 저의 태도는 거듭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만난 그 아침에는 “어떻게 예수님을 이유도 없이 믿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저에게 급격한 변화를 일어나게 한 복음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백주 대낮에 밝은 태양보다 더 분명하고 항거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반응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날 것에 대해서 주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래서 복음을 받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전혀 다른 반응에 이상해하거나 당황스러워하거나 의기소침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저절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거듭나지 않은 사람, 영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이처럼 죄인들은 본성적으로 복음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인간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 수준이며 영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이나 지식이나 정서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이해시키려고 한다든지, 그들이 잘 대우하고 환영해주면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뻔한 반응을 알면서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더라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 저항적이고 반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세상과 대화를 시도한다”, “불신자를 위해 문턱을 낮추어서 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한다”,

“교회가 얼마나 친화적이고 열린 공간인지를 알려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한다”

어쩌면 참 고마운 생각과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세상과의 경계선을 넘지 않는 다수의 세속적 교인들은 아예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극단적이고, 이 시대를 모르는 이야기이고, 사람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복음을 가장 쉽게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교회 안에서 성도에게 복음의 핵심과 본질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는 이상하고 아이러니한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때,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복음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거부와 발악이 있었고 심지어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죄인들의 본성 안에는 인간 스스로 복음을 이해한다거나 따뜻한 느낌으로 복음에 반응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예 없습니다.

이런 세상의 한복판에서, 이교적이고 정말 악했던 로마시대에 성령께서는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 복음이 부끄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환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본성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웬만한 확신을 가지고 이 십자가의 복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부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이 복음이 온 유대와 이방 땅 끝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서도 듣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복음의 본질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는 일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들 역시 수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저항에 부딪쳤지만 다른 수단이나 방법을 택하지 않고 복음의 메시지를 결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이라서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인은 이방인이라서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고전 2:2). 왜냐하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이 세상을 구원할 다른 지혜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복음을 부끄러워하시나요? 온 세상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설득하고 사정하고 구걸해서 전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담대히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해 가능하거나 육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걱정 따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들도 모든 저항이나 거부, 자기들이 당하는 박해와 푸대접과 외면도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듯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오히려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됩니다. 우리의 설득력이나 대단한 문화적 접근 때문에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내 삶에 찾아온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을 얻을 자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 불가능한 세상과 역사의 한복판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기적은 우리가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 할 최고의 기적 역시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안 믿어요? 어떻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안 믿죠?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아멘이시지요? 할렐루야!

– 나에게 생생한 복음, 김용의

†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 기도
하나님, 저를 주의 자녀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고 받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뿐임을 알고 선포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복음이 증거되면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듣고 기뻐하여 복음을 믿는 반응과 복음을 거절하여 박해하며 쫓아내는 반응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복음을 어떻게 듣고 믿으셨습니까? 우리도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들리는 전도의 한 말씀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늘 십자가의 복음만 선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