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처음 읽던 청년 시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이 참 많았다. 그중 대표 구절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4)라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면서, 왜 그분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십자가를 지라 하셨을까.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대한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죽으셨다면서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고백을 하며 우리에게 이 고난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을까.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은 이 외에도 많았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도 그중 하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분께로 가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쉬게 해주겠다고 하신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 하신다. 그리하면 우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면서.

그러고 보니, 내가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것은 모두 십자가와 관련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셨지만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라 하셨으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멍에를 메셨지만 우리도 그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 하신다. 그러니까 나는, 그 십자가와 자기 십자가, 그 멍에와 우리의 멍에, 그 고난과 남은 고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먼 훗날에야 나는 《구속의 심리학》에서 보여준 오스왈드의 통찰을 통해 이 개념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오스왈드는 이 책에서 내가 알고 싶었던 이 세 구절의 말씀을 연결해 ‘자기 십자가’와 ‘메야 할 멍에’, 우리가 참여해야 할 ‘남은 고난’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라 말해주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내가 우상이 되고 시간이 우상이 된 이 시대에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릴 때,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라는 말씀대로 우리 삶의 가시와 찔레가 즉시 사라진다는 설명이었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대로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는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만이 지실 수 있고 예수님만이 완성하신 십자가와 고난은 ‘구속의 십자가’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죗값을 지불하셨음을 믿으면 누구든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구속의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질 수 없고 완성할 수 없는 십자가다.

그러므로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구속의 십자가와는 다른 십자가다. 우리는 다만 그 구속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내 이웃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랑의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 우리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로서 우리의 헌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실천에 옮기라는 뜻으로 온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자신을 일치시키라는 말씀이다.”

오스왈드의 이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중보기도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중보기도란 남편이 늘 말해왔던 대로 ‘헌신’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듯,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내가 죽기까지 ‘기도하는 일’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마땅히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형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중보기도는 모든 기도 중 가장 순결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간교하고도 사악한 자기중심성을 돌아볼 때, 나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사심이 빠진 순결한 기도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떤 이들은 중보기도를 ‘별 중에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어떤 면에서 중보기도를 촛불이라 말하고 싶다. 촛불이 빛을 밝히는 까닭은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빛을 밝혀 어둠 속에 헤매는 한 영혼이 길을 찾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을 태우면서까지 말이다.

누군가를 위한 중보기도도 이와 같다. 자신에게 돌아올 아무 유익이 없어도, 혹은 내가 내 시간을 태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너만은 살아다오’라는 자세로 드리는 중보기도야말로 촛불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하나님께선 내게도 중보기도의 불을 밝히라는 부담을 지속적으로 넣어주셨다. 한 해, 두 해, 기도하면 할수록 나를 위한 기도는 줄어들고 이웃을 위한 기도가 많아지게 하셨다. 성령의 자연스러운 인도하심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 문제에 집중하느라 나 자신을 온전히 던져 누군가를 위한 중보기도자로 서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때에, 나를 위한 기도의 불을 환히 밝혀주는 누군가의 기도에 먼저 응답해주심으로써 나를 그 어둠에서 탈출하도록 이끄셨다.

우리 가정이 누군가의 중보기도와 응원의 열매로 그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줄 내가 아직 예측하지 못할 때였다. 하나님은 그런 때에, 허우적거리는 우리 가정을 그분의 오른손으로 붙잡아 건져주셨다. 그것도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 그 무덥고도 시린 계절의 한복판에서….

–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한근영

† 말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 사무엘상 12장 23절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 시편 145장 18절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야고보서 5장 15, 16절

† 기도
아프고 힘든 지체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할 때 주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기도합니다.

† 적용과 결단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습니까? 중보기도를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하며 결단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