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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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우다 보면 여러 가지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잘 놀다가도 (병원이 문 닫은..) 밤이면 갑자기 열이 오르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잠시 (아주 잠시였습니다) 눈을 뗀 것뿐인데 정글짐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합니다.

위급한 상황에 아이를 종합병원 응급실로 둘러업고 뛰며 제가 할 수 있던 것은 ‘주님’, ‘주님’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보호자 한명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병원 예배당 바닥에서 흐느끼며 주님의 은혜만을 구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이런 위급 상황의 때에만 주님을 간절히 부르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의 삶에서 주님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구하는 부모 되길 축복합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몰랐다.
아내는 문 앞에서 반갑게 맞아주었고, 2살 된 딸 모건이 아직 낮잠을 자고 있는데 너무 오래 잤으니 나더러 가서 아이를 깨우라고 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딸의 방문을 열었을 때 커다란 소나무 서랍장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보았다.
처음에는 모건이 그 서랍장 밑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방을 둘러보며 아이를 찾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 아이가 그 밑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미친 듯이 그 가구를 들어 올렸다.
모건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큰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모건은 숨을 쉬고 있었으나 의식이 없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서 딸의 모습 같지가 않았다.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911을 눌렀다.
전화벨이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내가 모건을 안았고 우리는 급히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운전을 했고 아내는 뒷좌석에서 딸아이를 안고 있었다.

다시 911에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나는 무서웠고 화가 났다. 생전 처음 911에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다니!

내가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절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시 911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아내가 뒷좌석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모건을 위해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 그녀와 함께 큰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기도는 정돈되지도 않고 매끄럽지도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당신이 기도해, 그다음에 내가 기도할 테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도는 대화라기보다 울부짖음에 더 가까웠다.

마침내 병원에 도착해 뛰어들어갔다.
모건은 여전히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다음 몇 분간은 내게 약간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모건을 둘러싸고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어떤 검사를 해야 할지 결정했다. 그들은 내출혈, 두개골절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은 모건이 의식을 회복하고 깨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었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X레이와 MRI 검사를 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부모 중 한 명만 아이와 함께 방에 들어오게 해주겠다고 했다.
아내가 바로 들어갔고, 나는 혼자 복도에 남았다.
나는 반쯤 누운 자세로 벽에 기대어 앉아 계속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또는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절박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없다.
우리는 그날 밤을 병원에서 보냈다.
의사들은 내부 손상은 없어 보인다고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건은 왼쪽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의사는 신경 손상에 대해 아직 의학계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그것을 영구적인 증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제 아이가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했다.

몇 주가 지났는데도 아이는 여전히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우리는 그녀의 다리 근육이 위축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매일 아침 아내와 나는 아이의 방에 들어가 아이를 깨우고 기도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움직였다.
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드디어 신경 손상이 모두 치료된 것이었다.
모건은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돌아보면, 차가운 병원 복도 바닥에 앉아 있을 때 느꼈던 그 철저한 무력감이 기억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 순간만큼 하나님이 내게 더 가까이, 혹은 더 실제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나는 아름다운 성전 안에서 기도드린 적도 있고 사람들로 가득 찬 원형 경기장에서 예배드린 적도 있지만, 그 차갑고 외롭고 고요했던 병원 복도에서만큼 하나님이 강력하게 내게 나타나신 적이 없었다.

나의 철저한 무력함이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과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적이 없었다면, 아마 앞으로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아마 당신에게 매우 힘든 경험이었을 것이다.

은혜는 우리의 약함을 기뻐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 순간에 관한 진실은,
비록 고통으로 가득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질 가능성이 가장 큰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왜일까? 우리는 은혜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만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함을 칭송하고 약함을 비난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은혜는 우리의 약함을 기뻐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약함을 기뻐할 때 그것이 수문을 열어 은혜가 우리의 삶에 쏟아져 들어오게 해준다.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부어지면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약함을 기뻐하게 된다.

그것은 순환, 즉 아름다운 순환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 속에서 최고로 일하실 수 있다면
내게 아무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약함을 기뻐할 수 있게 해주며, 더 많은 은혜가 삶에 흘러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준다.
당신은 아름다운 은혜의 순환에 들어선다.
<은혜가 더 크다> p194 카일 아이들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