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히스토리 6] 제자도의 길 : 아나뱁티스트와 경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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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교회 역사학적 측면에서 아주 의미 있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이 지금의 내 신앙생활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종교개혁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함께 살펴보러 가시죵


재세례파 익사 처형

# 아나뱁티스트의 출현과 핵심 사상

개신교 종교개혁은 당시 부패한 가톨릭 교황청의 교리와 관습을 오직 말씀으로 개혁하자는 취지에서 일어났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운동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의 개혁에 대항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의 지도자는 콘라드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이다.

츠빙글리의 개혁을 지지하던 그들은 집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츠빙글리의 개혁이 충분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의 사상은 얼마 뒤, 스위스와 독일의 국경 도시 슐라이트 하임에서 열린 최초의 아나뱁티스트 노회에서 마이클 새틀러라는 지도자에 의해 문서로 정리된다.

이것이 바로 재세례파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인데 그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구원을 체험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

그들은 세례의 기준을 높여서 교회를 순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례는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신자,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 그것을 다른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의지로 고백할 수 있는 성인들에게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재세례파’라고 불리게 된다(‘아나뱁티스트’란 말은 ‘재세례파’란 뜻이다).

또한 세례가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몸을 물에 온전히 담그는 침례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했다.

2. 정교 분리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와 정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크리스천들은 누구의 강압이나 조종도 받지 않는 자유인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믿음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선물이며, 공권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으로 강요하는 것은 도를 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는 성경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제자도를 가르쳤다.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내적 체험과 교리적 이해보다 더 깊은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보기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시작

아나뱁티스트들은 급진적인 신학을 가지긴 했지만, 매우 도덕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저속한 대화를 삼가고, 겸손하며, 공정하고, 온유한 삶을 살았다.

가난한 자, 계급이 낮은 자, 배우지 못한 자들도 차별하지 않고 존중했다. 그들은 부의 재분배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항상 정성껏 돌보았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아나뱁티스트들을 잘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집을 굽히지 않자, 츠빙글리는 이 문제를 취리히 시 의회에 상정했다. 1525년 1월, 양쪽 의견을 다 수렴한 시 의회는 츠빙글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1525년 1월 21일,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다. 거기서 전직 사제였던 조지 블라우록이 그레벨에게 자신에게 사도들의 방법으로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공적 신앙고백을 한 뒤에 베푸는 세례를 의미했다. 이것이 급진적 종교개혁인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시초가 된다.

# 아나뱁티스트를 향한 핍박

그 세례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뒤, 이들은 취리히 근교의 작은 마을로 이주하여 역사상 최초의 아나뱁티스트 회중을 이룬다. 1526년 3월 7일, 취리히 시는 누구든지 재세례를 받는 자가 있다면 즉시 물에 익사시켜 처형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아나뱁티스트의 핵심 사상이 담긴 마이클 새틀러의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이(1527)이 발표된 후, 그 고백의 입안자들 대부분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후기 아나뱁티스트 주자 메노 시몬즈

메노 시몬즈

후기 아나뱁티스트들 중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인물로 메노 시몬즈(1469-1561)가 있다. 네덜란드의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1536년에 아나뱁티스트로 개종했다.

메노 시몬즈의 신앙은 정통 아나뱁티스트의 정신을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그는 성경적이고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모습은 거듭난 사람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평화와 봉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다.

메노 시몬즈는 확고한 평화론자였다. 하지만 이런 온건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메노나이트들은 무섭게 핍박당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을 존경한다(그들의 사회 봉사 때문이다). 메노나이트들은 아주 효율적이고 희생적으로 사회의 어둡고 아픈 곳을 만져주며 활발한 자원봉사 활동을 펼친다.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그들의 활동은 정말 감동적이다.

# 경건주의의 시작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00여 년 뒤 루터의 후예들은 ‘개신교 스콜라주의’ 활동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칼빈주의자들과 가톨릭과 싸우고, 또 자기들끼리 싸웠다. 그들은 복잡하고 치밀한 조직신학을 만들었다.

무엇이 정통 신학이냐가 관심이었고, 교과서적인 예배 의식 참가가 중요했다. 극히 메마르고 형식적인 종교, 지적인 논리와 전통을 중시하는 종교, 가슴의 뜨거운 열정이 없는 기독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운동이 바로 경건주의다.


# 경건주의의 아버지 필립 스페너

필립 스페너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목사로 있던 당시, 이미 스페너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체제를 개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생각하는 바른 믿음은 바른 영성과 경건성(헌신과 사랑의 행위가 합쳐진 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바른 믿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른 감정이라고 믿었다. 크리스천의 신앙이란 개인적으로 살아 있는 깊은 신앙이어야 했다.

경건주의 개혁의 핵심 주제사상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안에서 더 세밀한 하나님의 말씀 적용이 있어야 한다.
2. 모든 크리스천들이 적극적으로 사역에 동참할 것을 주장했다.
3. 진정한 신앙은 진실한 삶으로 드러나야 하며, 기독교는 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이다.
4.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모두가 절제하고 서로를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5.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의 개혁을 요구했다.
6. 목회자들이 어렵고 난해한 교리 설교나 다른 성직자들을 공격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했다.

스페너는 이 여섯 가지 방침이야말로 교회를 새롭게 부흥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페너의 경건주의는 동시에 문제점도 야기했다. 먼저 지나친 주관주의 성향과 반지성주의 성향이다. 그리고 어떤 평신도들은 스페너의 주장을 전통 교회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라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

# 경건주의의 유산과 반작용

경건주의자들은 독일뿐 아니라, 세계 전체 기독교에 큰 기여를 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초기의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 가던 무렵, 경건주의는 새로운 성령의 감동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경건주의자들의 핵심 주제는 ‘중생'(regeneragion)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신학적 교리로 이해한 게 아니라 영혼의 생생한 체험으로써 확인했다.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은 경건주의로부터 두 가지 전통을 물려받았는데, 이것은 플러스 요소도 되었지만 마이너스 요소로도 작용했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의 날카로운 교리에 대한 반등작용으로 따뜻한 감성의 신앙을 강조하다 보니, 이번에는 또 감정 쪽으로 너무 치우쳤다.

둘째, 경건주의는 제도권 안의 교회의 존재를 전제했기에, 정면으로 교회를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생과 새로운 영적인 삶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 요소들을 전통 국가교회로부터 신자들의 작은 사적 소그룹 모임으로 옮겼다.

내용 발췌 = 한홍 목사의 종교개혁 히스토리
사진 = 강신욱, 규장, 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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