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히스토리 7] 존 웨슬리의 세계가 나의 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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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교회 역사학적 측면에서 아주 의미 있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이 지금의 내 신앙생활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종교개혁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함께 살펴보러 가시죵


# 종교개혁과 존 웨슬리

종교개혁의 역사를 다룰 때는 16,17세기에 초점을 맞춘다. 이번 이야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존 칼빈보다 거의 2백년 늦게 세상에 태어난 존 웨슬리와 그가 세운 감리교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과 신학적인 입장은 조금 달랐지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구령의 열정과 제도권 교회의 한계를 넘어 사회 구석구석까지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겠다는 신념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물이다.


말을 탄 모습의 웨슬리 동상

# 웨슬리의 성결론

가톨릭에서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과 함께 선행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항하여 16세기의 루터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주장했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의 책임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존 웨슬리는 중생한 신자가 성령체험으로 죄를 극복하는 능력을 누리는 것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성결론을 접목시켰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에 인간도 책임감 있게 반응해야 함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반칼빈주의인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웨슬리의 성결론을 이해하려면 웨슬리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웨슬리가 살던 당시 영국 사회는 종교적으로는 영국국교회가 전통주의에 빠져 생명력을 잃어버린 시대였고, 사회적으로는 산업혁명과 도시화 현상으로 인해 윤리와 도덕이 타락하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웨슬리가 왜 그토록 거룩과 성화를 강조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부흥운동은 결코 당시 죽어 있던 전통교회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 이신론, 세속주의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성결론만이 당시의 시대를 새롭게 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인디언들에게 설교하는 웨슬리

그는 성도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죄를 극복하는 자유함과 능력을 누리고,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웨슬리의 신학은 그 후 많은 주류 개신교 교단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감리교는 물론 성결교회 나사렛교단과 하나님의 성회가 특히 그러하다.

신자와 교회의 삶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다룬 웨슬리의 가르침은 성결 운동과 오순절 성령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시너지를 만드는 지도자

웨슬리가 매우 창조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의 새로운 생각을 적극 수용하고 활용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예를 들어 소그룹 사역을 처음 개척한 것은 모라비안들이었다. 하지만 존 웨슬리가 이것을 치밀하게 조직하고 활용하여 전국적인 감리교 조직의 세포로 키웠다.

또 야외설교를 시작한 것은 조지 휫필드였지만,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야외설교를 하는 사역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웨슬리였다.

웨슬리가 기독교사에 공헌한 것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것은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이었다.

감리교 평신도 리더가 되기 위해선 부자일 필요도 없고 고등 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이때까지 영국국교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평신도 사역 참여의 가능성이 열렸다.

웨슬리는 주일학교 아이들도 체게적으로 성경공부 과정을 거치게 해서 한 과정을 끝날 때마다 색깔이 다른 리본과 상을 주어 동기부여를 시켰다. 획기적인 사역 전략으로 인해 웨슬리가 죽을 무렵에는 이미 12만 명이 넘는 감리교도들이 있었다.


존 웨슬리

# 웨슬리가 남긴 도전, 지상명령 완수의 열정

웨슬리는 가진 수단이 너무 빈약했는데도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해서 그토록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풍성하고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비겁하고 게으른 것은 아닐까?

기성교회가 강단을 허락해주지 않을 때 웨슬리는 좌절하지 않고, ‘온 세상이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면서 야외집회로 방향을 돌렸고, 그로 인해 온 세상으로 그의 사역 영역이 넓혀졌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웨슬리 자신은 영국국교회로부터 탈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역사적 정황상 그가 세운 감리교회가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항상 “나는 영국국교회 교인으로서 죽을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웨슬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끝까지 영국국교회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워낙 혁신적인 그의 신학과 사역의 성격으로, 더이상 감리교는 국교회와 공존할 수 없었다. 웨슬리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이미 감리교가 독립된 교파로 변모하고 있었다.

내용 발췌 = 한홍 목사의 종교개혁 히스토리
사진 = 강신욱, 규장, 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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