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훈련만 외치니 지치네요. 그런데 자발성 없는 훈련이 의미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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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이 땅에서 가장 발전되지 못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출생 직후 아비와 어미를 잃는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발달된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를 배워야 하는 존재이다. 갓 태어난 인간은 엄마의 젖가슴에서 젖을 빨아먹을 수 있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의 많은 단계들이 이 본능 하나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아이는 나이프, 포크, 그리고 스푼을 가지고 식사하는 법과 컵을 가지고 물을 마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식을 길러본 많은 부모들이 체험하듯이, 이런 배움의 과정은 길고 힘든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자식이 삶에 적응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는 데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방금 이야기한 육체적 출생과 양육에 관한 이야기는 영적 출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중생(重生)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다.

하지만 중생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 다음에는 성장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에게 믿음 안에서 부모, 형제 및 자매를 붙여주신다. 물론 그 목적은 그들이 새 신자의 영적 성장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영적 성장은 한번에 또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훈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밥이나 국을 쏟지 않고 식사하는 법을 배우고 넘어지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듯이, 우리도 영적 성장을 위해 배워야 한다.

훈련이 자발성을 말살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포크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자발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단지 훈련이 안 되었을 뿐이다.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은 여러 해 동안 반복적이고 때로는 지루한 훈련 과정을 거치지만, 경기나 연주 중에는 매우 자발적으로 경기하고 연주한다. 즉, 경기나 연주 중에 그들의 근육과 감정과 생각은 매우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문제들에서도 우리는 훈련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영적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유혹의 순간에, 순종해야 할 순간에, 찬양해야 할 순간에, 증거해야 할 순간에 자발성이 발동하여 신앙적 선택을 하게 된다.


자발성을 위한 전제 조건

훈련 자체가 자발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훈련은 자발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 성경 읽기, 예배, 금식 및 구제의 훈련을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변덕스러운 기분 때문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 때문이다.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자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평생 영적 훈련을 실행한다. 왜냐하면 훈련은 그가 자발적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훈련을 통해 습관화된 행동들이 신앙과 아무 관계없이 인위적인 것으로 전락하여 타성에 빠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루 종일 푸시업(push-up)만 하면서 결코 링(ring, 체조 경기의 한 종목)에 오르지 않는 체조 선수처럼 될 수도 있다.

당신은 그가 왜 ‘링’에 오르지 않는지를 아는가? 그것은 그가 사고의 위험이 없는 기초체력 운동을 하는 데 아주 익숙해져서 편하게 기초체력 운동만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링’에 올라 힘차게 창공을 가르며 마음껏 재주를 펼치는 사람은 사고의 위험성을 잊어버리고 체조의 스릴을 즐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선수들은 혼자서 훈련하지 않고 단체로 훈련하는 것이다. 단체로 훈련하면, ‘링’에 오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서로 독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를 지켜보다가 “친구여, 어찌하여 더 이상 ‘링’에 오르지 않는가?”라고 말해줄 친구들이 우리 주위에 필요하다.

훈련과 자발성의 유기적 관계를 시험해볼 수 있는 기준은 사랑의 행동이다.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깊은 교훈을 가르쳐주는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체험하는가?”라고 묻는다.

그의 물음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잣대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자발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우리의 뇌에 삽입함으로써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발성에만 의존해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오랜 세월 사랑을 실천해온 사람들은 끈질긴 훈련과 노력 없이는 사랑의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사랑의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은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사주는 수준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신령한 생활을 방해하는 무서운 적은 바로 이기심, 즉 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습관에만 얽매여 있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만을 생각한다. 반면 영적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생활방식을 과감히 깨어버린다. 영적 훈련은 게으름의 습관을 깨어버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주인이신 큰 세상으로 인도한다. 이 큰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교회의 의식들은 영적 훈련의 좋은 경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는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일마다 정해진 시간에 우리는 각자의 개인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예배의 세계로 들어간다. 1년 중 정해진 때가 되면 우리는 판에 박은 듯이 반복되는 세상의 일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역사(歷史)를 상기시키는 절기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영적 훈련을 위한 작은 의식들을 실천하는데, 이는 이런 의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영적 훈련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신자들은 영적 훈련이 대부분의 경우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인가를 오래 기다려야 할 때 우리는 참지 못한다. 어떤 훈련에 즉시 강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즉각적으로 그것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 훈련의 가치를 깨닫는 데 더디기 때문에 그것이 지루하고 단조롭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럴 때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더 충만한 영적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성령님이 일하실 것이다.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리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주실 것이다.

내용 발췌 = 기독교 교양 : 유진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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