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의 주제 : 로마서는 성경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을 수 있는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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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이 서신이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주저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 찬사가 이 서신이 가진 위대함에 한참을 못 미칠 텐데 내가 하는 말이 오히려 그 빛을 가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또한 서신의 맨 처음 부분에서 내가 동원해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말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이 서신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로 서신의 주제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듯하다.

주제를 살피다보면, 이 서신이 다른 많은 주목할 만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한 번도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적이 없는 한 가지 장점을 특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입증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서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성경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모든 보화들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서신 전체가 너무도 꼼꼼하고 체계적이라서 시작 부분도 그 자체가 기교 있게 구성되어 있다. 앞으로 가면서 살펴보겠지만 저자의 뛰어난 재주는 여러 부분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주요 논점을 추론하는 방식에서 그의 재주는 특별히 빛을 발한다.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고 나서 바울은 복음을 소개한다. 복음에 대한 소개는 믿음에 관한 논쟁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이것을 연결 고리로 삼아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하여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는 서신 전체의 주요 주제로 접어든다. 그는 5장 끝부분에 이를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다룬다. 그러므로 1장부터 5장까지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일한 의義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이 의는 복음을 통해 제시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인간은 죄 가운데 잠들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우쭐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의기소침해진 경우가 아닌 이상 자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인간은 욕정의 달콤함에 너무도 흠뻑 취해 있고 태평한 삶의 방식에 아주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깨워서 의를 추구하게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그러하다. 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일에 착수한다.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지 납득시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다.

 


경건하지 않음의 죄

우선 그는 창세創世로부터 온 인류가 감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책망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에 나타난 탁월함을 보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때, 그들은 마땅한 존경을 표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생각으로 그분의 위엄을 더럽히고 손상시킨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이 경건하지 않음의 죄를 범했다고 비난한다. 경건하지 않음은 모든 죄악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좀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바울은 인간이 도처에서 저지르기 쉬운 가증스럽고도 무서운 행위들을 기록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악행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증거들이며,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일부 이방인들은 외적인 거룩함이라는 망토로 자기들 내면의 사악함을 감추었다. 그들은 바울이 언급한 악행들에 대해서 책망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죄를 당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생각되었다.

바울 사도가 거짓된 거룩함에 대해서 언급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를 성자聖者라고 칭하는 이들에게서 이 거룩함의 가면을 벗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 앞으로 불러낸다. 인간의 감추어진 욕망까지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심판 앞으로 불러낸다.

그런 다음 그는 구분을 지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로 세운다. 이방인의 경우, 그는 무지無知해서 그랬다는 그들의 변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유죄라고 선언하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에 관해서는, 그들이 자기들을 변호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것, 즉 성경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들이 성경을 범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이상, 그들이 자기들의 사악함을 부인否認할 길은 없다. 이미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그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이 이의異意를 제기할 수도 있을 법한 내용에 대해서 선수를 쳐서 막는다.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면, 그들에게 거룩의 표가 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깨졌을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 미리 막는다.

여기서 먼저 그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님을 밝힌다. 이는 그들이 불성실하여 그 언약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가지고 있는 불변성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 언약이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특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특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한 것이지 그들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진 특별한 자격에 관한 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과 동일한 수준에 있는 셈이다. 이제 그는 성경의 권위를 사용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죄인임을 증명한다. 또한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그는 인류가 스스로의 선함을 신뢰하고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함을 들어 그들의 기를 꺾어놓는다. 이제 그는 자기가 앞에서 주장했던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명제로 되돌아간다. 그는 믿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얻는지 설명한다.

그는 3장 끝부분에서 멋진 결론을 덧붙이는데, 이는 인간의 자만심이 가지고 있는 흉포함을 저지하고 그 자만심으로 감히 하나님의 은혜에 맞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자기 민족에게만 국한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사랑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4장에서 너무도 분명해서 아무런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한 가지 예를 제시함으로써 논증을 해나간다. 그 예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기에 우리가 그를 하나의 모형과 일반적인 유형으로 삼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한 후에, 우리도 그와 동일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바울은 정반대되는 두 가지를 대조함으로써,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결론을 덧붙인다. 그리고 다윗의 증언을 들어 이 사실을 확증한다. 다윗은 인간의 복됨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에, 행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만한 힘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앞에서 잠깐 가볍게 언급했던바,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이방인들보다 높게 여길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주제를 좀더 충분히 다룬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인간의 행복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공통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증거한다.

바울은 여기서 할례의 용도에 대해서 약간 언급할 기회를 얻는다. 그런 다음 구원의 약속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의존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만일 구원의 약속이 율법에 따라 결정된다면, 인간의 양심은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며(사람들이 양심으로 그 약속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약속은 온전히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고 틀림없는 것이 되도록 하려면, 그것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진리만 생각해야지 우리 자신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 이 구원의 문제에서 우리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던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야 한다.

4장 끝부분에서 바울은 비슷한 점들을 가지고 있는 두 가지를 비교하는데, 이는 자신이 제시한 아브라함의 예를 좀더 넓게 적용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화

5장에서는 믿음에서 난 의의 열매와 효력에 대해서 다룬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앞에서 말한 것을 부연 설명하는 쪽으로 이 장의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한다. 이는 자기가 주장하는 요점을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정도가 심한 경우를 논증함으로써 그보다 정도가 덜한 경우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구속救贖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기대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풍성한 사랑을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에게 쏟아부으셨다. 이제 바울은 죄와 값없이 얻은 의義, 아담과 그리스도, 사망과 생명, 그리고 율법과 은혜를 서로 비교한다.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에 그 모든 것들이 삼킨 바 된다는 사실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6장에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성화聖化에 대해서 논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맛보고 나서, 마치 은혜가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그 본래의 부도덕함과 욕망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해 바울은 성화에 대한 이해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례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의 논리를 펼친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게 해준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그분의 생명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림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거듭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근거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이 정결함과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죄를 지을 수 있는 더 큰 자유를 추구하는 육신의 불경건한 탐닉을 그만둔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죄의 나라에서 의義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에게서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것들이다.

바울은 또한 율법의 폐지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는데, 율법을 폐함으로써 신약新約이 빛을 비추게 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언약에는 죄의 용서와 함께 성령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용도와 구원의 보증

7장에서 그는 율법의 용도에 대하여 편견 없이 논하기 시작한다. 그는 앞에서 다른 주제를 다룰 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율법 자체가 우리를 정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논증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비난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율법이 온갖 당치않은 오명을 뒤집어쓸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율법이 사망의 수단이 되어버린 것은 우리의 잘못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율법이 어떻게 죄를 더 죄 되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밝힌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영靈과 육肉의 싸움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 싸움은 신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탐욕의 잔재殘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8장은 많은 위로의 말씀을 담고 있다. 이는 그가 앞에서 비난한 바 있는 불순종에 대해서,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온전하지 못한 순종에 대해서 신자들이 알게 될 때 그들이 너무 겁을 먹거나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이 이러한 위로를 근거 삼아 우쭐거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이 풍성히 거하는 거듭난 자들만 이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진술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 두 가지 진리를 설명한다. 첫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모든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죄짐에 아무리 무겁게 눌려 있어도 정죄를 당할 위험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성령의 성결케 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채 육신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엄청난 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에 바울은 우리 믿음의 확신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친히 증거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반대 의견이 제기될 것을 알고는, 이 세상에 살면서 당하게 되는 고난 때문에 영생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방해를 받거나 흐트러질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우리의 구원은 그러한 시련을 통해 촉진된다. 우리 구원의 탁월함에 비하면,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모든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맏아들이고 하나님의 집에 머리가 되시기에 우리 모두가 따르고 본받아야 할 분이신 그리스도의 예를 들어서, 바울은 이 사실을 확증한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게 보증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사탄의 세력과 술수에 대한 담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멋진 찬양의 어조로 결론을 맺는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분의 뜻

언약의 중요한 수호자요 상속자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고민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는 언약의 성취를 하찮게 생각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서 언약이 폐기된 증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더 나은 대책을 마련해주지도 않은 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속된 구속자救贖者가 아니라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9장 처음 부분에서 이러한 이의異議에 대해서 논박한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이는 혹시 자기가 그들에게 악의를 품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나게 해주는 구별된 특징들을 적절하게 언급하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서서히 진행시킨다. 즉, 그것은 유대인들이 눈멀었기 때문에 범하게 된 죄를 없애는 작업이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 그의 씨로 여김을 받거나 언약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녀를 두 부류로 나눈다. 사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에 들어오게 되면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서 이 진리를 설명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일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택함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달려 있는 것이므로, 인간의 가치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유기遺棄도 존재한다. 그분의 유기가 정당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 외에는 어느 것도 그 원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9장 끝부분에 가서 그는 이방인의 부르심과 유대인의 유기에 대한 증거가 선지서에 제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차별 없이 의가 주어졌다

그는 다시 유대인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으로 10장을 시작하면서,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근거 없는 신뢰가 유대인들이 파멸하게 된 원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핑계 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도 우리를 믿음에서 난 의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에게 차별 없이 이 의義가 주어졌으나 그분이 특별한 은혜로 빛을 비추어준 사람들만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한다. 또한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이방인들이 이 축복을 받게 되었으나 이것 역시 모세와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음을 밝힌다. 모세는 이방인들이 부름 받는 것에 대해서, 이사야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에 대해서 예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씨와 다른 나라들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질문에 대해 답하려 할 때,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택하심의 문제는 자주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는 오해였다. 칠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을 싫어하는 불신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고 이른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언약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된 자들에게 동일하게 남아 있지만 그분의 자유로운 택하심에 의해서 예정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그러하다고 단언한다. 그런 다음 이방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양자 됨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버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냉대冷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받아주셨다는 사실 외에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다. 사실 이것은 그들이 더 겸손해야 할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씨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결국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믿음을 시기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그분 자신께로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지침과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

이어지는 세 장은 권고의 글이지만 그 내용은 각기 다르다. 12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들을 담고 있다.

13장의 대부분은 위정자爲政者의 권위에 대해서 다룬다. 아마도 국가 권력을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런 자유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던 모양이다. 교회에 사랑의 의무 외에 다른 어떤 의무를 부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바울은 국가 권력에 복종하는 것 역시 사랑의 일부임을 설명한다. 그런 다음 그는 지금까지 언급한 적이 없는 우리 삶에 대한 지침들을 덧붙인다.

14장에서 그는 그 당시 특별히 필요했던 권면의 말을 한다. 당시에 미신적 관습을 고집하는 마음이 강해서 모세의 의식儀式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 의식들을 지키지 않는 것이 가장 무거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러한 의식들이 폐기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서 미신적 관습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양쪽 다 그 정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전자는 상대편이 하나님의 율법을 업신여긴다고 경멸한 반면, 후자는 상대편이 너무 단순하다고 분별없이 비웃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양쪽 모두 신중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전자에게는 업신여김과 모욕을 삼가라 하고, 후자에게는 지나친 불쾌함을 드러내지 말라 명한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랑과 덕을 세우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어떤 것이든 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절한 관심과 존중을 표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다

15장은 바울의 개괄적인 논증을 반복함으로써 시작하는데, 이는 그가 다루고 있는 전체 주제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그 주제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세우는 데 자기의 강함을 사용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세의 예식에 대해서 계속 논쟁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들의 오만함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있는 모든 시기심을 해결한다.

그는 그들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모든 교만한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또한 그분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하나의 동일한 기업에 대한 소망 가운데 결속을 이루고 서로 상대방을 온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에게 가르칠 수 있는 고귀한 권위를 보장해준 자기의 사도직을 찬양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가 그들 가운데 교사로서의 직분을 맡은 것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변호한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비추면서 그 근거를 몇 가지로 제시한다.

물론 그가 이 서신의 초반부에 밝힌 것처럼, 지금까지 여러 번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자 시도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헌금한 것을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거의 전체가 안부를 묻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여기저기에 감탄할 만한 훌륭한 가르침들이 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기도로 끝을 맺는다.

.  칼빈주석 로마서 1장 1-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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