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NO.1] 1장 1-7절_바울 / 예수 그리스도의 종 /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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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1-7


1 바울 바울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만큼 그 이름의 배경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해석자들이 자주 언급한 내용 외에 내가 추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나,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너무 지루하지 않게 몇 마디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짧게 다룰 것이다.

바울 사도가 총독 서기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한 것 때문에 그 기념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누가에 의해 오류임이 입증된다. 누가는 바울이 서기오의 회심 사건 이전에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행 13:7,9). 또한 나는 바울 자신이 회심할 당시에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별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로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이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그 견해 덕분에 자만심 강한 사울이 그리스도의 보잘것없는 종이 된 것에 대해 멋진 논증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바울이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오리겐(Origen, 185~254. 알렉산드리아 파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교부)의 결론이 더 타당성 있어 보인다. 사실 그의 종교와 혈통에 대한 표시로 부모가 사울이라는 가족명을 지어주었는데,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증거로 바울이라는 별명이 나중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많다.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었으며, 바울이 살던 당시에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의 부모는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감추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증거를 숨기게 할 만큼 그 사실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쓴 서신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이름은 바울이었다.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울이라는 이름이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편지를 받아볼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그 이름이 더 잘 알려진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바울 입장에서 볼 때, 일부러 유대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로마에서나 각 지방에서 공연한 의심과 맹렬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은 피해야 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것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보증하기 위해서 바울이 스스로 붙인 칭호이다. 그는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이 소명이 로마 교회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자기 독자들에게 알림으로써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확실히 한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사도가 되었다고 인정받는 것뿐 아니라 특별히 로마 교회를 위한 사도로 알려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이는 어쩌다가 주제넘게 사도가 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그런 다음 그는 바로 이어서 자신이 ‘택정함을 입었다’고 덧붙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단순히 하나님의 여러 백성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사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강조한다.

사도의 직분은 특별한 종류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일반적인 주제에서 특별한 주제로 논증을 옮겨가고 있다. 가르치는 직분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의 무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종의 무리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예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그의 사도직의 목적과 용도 모두 표현해준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한다). 이 어구語句를 사용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사도의 직분을 맡도록 택함 받은 목적을 짧게나마 언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에게 붙인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칭호는 가르치는 일을 맡은 다른 모든 교사들과 공유하는 것이지만,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더 높은 위치에 두고 있다.

그러나 주제넘게 고집을 피워 사도의 직분을 강제로 탈취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이 어구의 의미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평범한 종이 아니라 사도라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주제넘게 애써서 된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 지명하신 사도이다. 그는 사도직에 대한 좀더 명료한 설명을 이어간다.

즉,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가 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고 ‘택하심’의 의미를 그의 어머니 태胎로부터 택정하신 것(갈 1:15에 언급된 것처럼) 혹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하신 것(누가가 언급한 것처럼)으로 보는 사람들의 의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바울의 유일한 자랑은 그를 부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가 주제넘게 사사로이 이 영예를 도용하고 있었다고는 도무지 의심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말씀 사역을 감당하기에 적절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사역은 특별한 소명을 필요로 한다. 자신이 다른 어떤 사역보다 말씀 사역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명을 받지 않은 채 그 직분을 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도와 감독으로의 부르심이 가지는 특징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할 것이지만, 주목해야 할 요점은 사도의 직책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자랑하면서, 머리에 쓰는 관冠과 손에 쥐는 홀笏과 그럴듯한 겉치레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 짓는 특징이 없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여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종’이라는 단어는 직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사역자라는 뜻을 나타낼 뿐이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가정 아래 이 단어에 대한 쓸데없는 사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2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어떤 가르침이 최근에 새롭게 소개된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면 그 권위가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이 아주 오래전부터 약속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 진실성을 확증한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갑자기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다. 또 그분이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가르침을 소개하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복음과 함께 창세로부터 약속되었고, 사람들은 줄곧 그분을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것은 신화적神話的인 허구성을 동반할 경우가 많으므로, 그는 최고의 정직성을 자랑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증인으로 소개한다. 이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는 선지자들의 증언이 정식으로 보증되었다고, 즉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이 어구를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되었을 뿐, 그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복음을 약속했다면, 그 복음이 계시된 것은 우리 주님이 드디어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라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복음과 약속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정확하게 말해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정해진 가르침이고, 약속은 그분 안에서 계시되는 것이다.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이 중요한 어구를 통해 바울은 복음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에게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는 것은 복음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살아계신 형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을 우리 온전한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자 중심으로 우리 앞에 세운다고 해서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에 관하여’라는 말은 복음을 기술하는 것이며,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나는 다음 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그의 아들’과 같은 격格에 해당하는 것으로 풀이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적절한 진보를 이루는 사람은 복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모든 면에서도 성장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반면 그리스도를 떠나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서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이다.

나셨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기 원한다면 그분 안에서 두 가지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다. 그분의 신성은 능력과 의義와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분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요약할 때 이 두 속성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으며 그 상태에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다고 말한다. 이는 복음서 기자 요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말한 후에, 그분의 바로 그 육신 안에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다고 덧붙인다(요 1:14).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매우 사려 깊은 처사이다. 이 특별한 문구가 우리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약속된 바로 그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의심을 완전히 없애주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너무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육신으로는 바울이 이 어구를 덧붙인 것은 그분이 육신 이상의 어떤 것을 소유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분이 하늘로부터 가지고 오셨지만 다윗에게서 받지 않은 어떤 것은 바울이 곧바로 이어서 언급하는 신성의 영광이다.

또한 그는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실제 육신을 가지고 계시다고 선언할 뿐 아니라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창조되지 않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신을 입으셨다고 주장한 세르베투스(Servetus, 1511~1553. 삼위일체를 부정함으로 이단시된 스페인의 자유사상가)의 불경스러운 허튼소리를 반박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이 어구의 ‘선포되셨으니’라는 표현 대신 ‘결정되셨으니’definitus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이 하늘의 뜻을 나타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2편 7절에서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여기서 ‘낳았다’는 것은 알려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해석자들은 이 어구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가지 증거들을 찾아내는데, 능력(그들은 이것을 기적으로 이해했다), 성령의 증거, 죽음에서의 부활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 가지 증거를 합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편을 선호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셨을 때 그분은 하늘의 참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을 공개적으로 행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우리가 이 능력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그것을 인쳐 주실 때이다.

바울이 사용한 언어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선포되셨다고 말한다. 엄격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속한 능력,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하는 능력이 그분 안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런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은 사실 그분의 부활에서 명료하게 드러났다. 바울은 다른 본문에서 이와 동일한 내용을 언급한다. 즉, 그는 육신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드러났다고 선언한 후에 그분의 부활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찬양한다(고후 13:4).

그러나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이 능력의 영광을 인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 영광을 알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보여주신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 신자들 개인이 그들 마음으로 경험하는 증거를 포함시킨다. 이는 그가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성령이 성결케 하는 한, 한 번 드러났던 그 능력에 대한 증거는 성령에 의해 확증되고 승인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자주 칭호를 붙이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금 다루는 내용을 밝히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면 우리 주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요 14:17)이라고 부르신다. 그 구절에 묘사된 성령의 영향력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또 그 신적인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종종 증거하신 것처럼 그분 스스로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이 성전聖殿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를(내 생명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요 10:18).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죽음에 굴복하셨지만 그 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쟁취하셨다. 이는 외부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영인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자신의 직분을 찬양하기 위해 꺼낸 복음에 대한 그 나름의 정의定義를 끝마친 후, 이제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주장하기 위해 돌아온다. 이 직분에 대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따로 언급하면서 환치법(換置法, 명사나 형용사를 그것이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 두지 않고 다른 형태로 두는 문법상의 변칙)이라는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사도의 직분이 값없이 주어졌음을 의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사도직의 은혜를 의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그가 이 고귀한 직분에 지명된 것은 그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물론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직분은 위험과 수고와 증오와 치욕을 당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성도들의 눈으로 볼 때는 결코 평범하거나 흔하지 않은 존엄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직분은 마땅히 은총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가 사도가 되는 은혜를 입어”라고 풀이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은데, 그 의미는 동일하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암브로스(Ambrose, 4세기 말에 활동한 밀라노의 주교이자 서방 교회의 교부)는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지명되었다는 의미로 이 어구를 설명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어구에서 ‘이름’이 지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인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일 3:23). 바울 자신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함 받은 그릇이라고 전해진다(행 9:15).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기 위하여’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순종하게 하나니 우리는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자기 소명의 목적이 무엇인지 진술함으로써, 바울은 다시 한번 로마인들에게 그의 직분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게 맡겨진 책임을 수행하는 것,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의무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너희의 의무이다. 주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소명을 너희가 무익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즉, 복음을 전해 듣고서 그것을 업신여기며 무례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그분이 정하신 모든 것을 그르치는 것이다. 복음이 의도하는 바는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믿음은 순종으로 언급되어 있다(우리말 성경에는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되어 있으나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는 ‘unto obedience of faith’라고 되어 있어서 믿음이 순종이라는 말로 불린다 – 역자 주).

이는 주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분이 부르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께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의도적인 불순종의 근원은 불신앙이다.

나는 ‘믿음에 순종하기 위하여’라는 번역보다는 ‘믿음으로 순종하기 위하여’라는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전자는 사도행전 6장 7절에서 한 번 사용되기는 했으나(우리말 성경에서는 믿음이라는 말을 ‘도’道라고 바꾸어서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번역했다 – 역자 주), 은유적으로 받아들이면 모를까 엄격히 말하면 바르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모든 이방인 중에서 자신의 사역이 제자 삼는 일과 관계가 없다면, 사도로 임명된 것은 바울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인다. 그는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도록 정해졌는데 로마인들이 그 이방인들의 수에 포함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로마인들의 사도로 더욱 분명하게 칭하고 있다.

사도들은 모두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들은 특정 교회의 목회자나 감독으로 임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로서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책임을 질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특별한 권위에 의해 임명된 것이다.

그가 비두니아를 거쳐 무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건이 이 진술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행 16:6-8). 그쪽으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은 그의 사역을 특정 지역에 제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곳이 아직 추수할 때가 되지 않았기에 그가 잠시 다른 곳에 가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있는 사람들과 좀더 긴밀한 관련이 있는 이유 한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미 그들 가운데 하나의 표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그 표적을 통해 자신이 로마 사람들을 복음에 참여하도록 부르고 계신다고 선언하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부르심을 여전히 확실하게 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바울의 사역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주님의 동일한 택하심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치 ‘즉’이라는 말이 그 앞에 삽입된 것처럼 이 어구를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해 그분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 어구를 말한 것이다. 영생을 상속하기로 되어 있는 자들은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에 의해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택함을 받을 뿐 아니라, 선택 받았을 때 목자로서의 그분의 돌봄과 신뢰 또한 약속 받는다.

 


7 모든 자에게 각 단어들을 멋지게 배열함으로써 그는 우리 안에 찬양하기에 합당한 내용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보여준다.

첫째, 주님께서 그분의 선하심을 통해 우리로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입게 하셨다. 둘째,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다. 셋째, 그분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셨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소홀히 여기지 않을 때만 이 고귀한 영예가 온전히 우리 것이 된다.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진리가 한 가지 담겨 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나머지는 독자들 개개인이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남겨두려 한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라는 샘에서 전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분 자신의 순전한 선하심 외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다른 이유는 없다. 그분의 부르심 또한 이 선하심에 의존한다. 이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자신이 이전에 자유롭게 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분 자신의 때에 양자의 인印을 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하게 된다.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비참한 죄인들에게도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살전 4:7)라는 말씀처럼 그분의 선하심에 고무되어 거룩함을 열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믿는 자들의 무리에 정당하게 들어갈 수 없다. 이 구절의 헬라어는 2인칭으로 번역할 수도 있으므로 여기서 특별히 인칭을 바꿔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탐나는 복은 없다. 이것이 ‘은혜’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공과 형통을 모든 일에서 누린다는 것 또한 큰 복이다. 이것이 ‘평강’이 의미하는 바이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면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 저주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 행복의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분의 선하심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번영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다. 또한 그분의 선하심 때문에 우리가 역경 중에 있을 때조차 우리의 구원이 촉진되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평강을 위해 기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복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열매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이러한 복을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도 똑같이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주님이 이러한 식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풍성한 선하심을 관리하고 나누어주실 뿐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해나가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모든 복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 바울이 여기서 특별히 의도한 바였다.

이 어구에 나온 ‘평강’이라는 단어를 양심의 평정平靜이라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다. 나는 이 단어가 가끔 그런 의미를 가질 때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여기서 하나님의 복을 요약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 한다는 점이 명백하므로, (부처가 제시한) ‘평강’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적합하다고 하겠다.

바울은 신자들이 행복의 극치를 소유했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행복의 원천 자체, 즉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영원한 지복至福을 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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