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을 겪는 거지?”라고 물을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운다. 이것이 욥의 큰 실수였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게 질문한 모든 사람 중에 엘리 위젤(Elie Wiesel)만큼 이 질문을 던질 자격이 있었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엘리 위젤은 나치 집단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갇혔다. 그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할 수 있는 극도의 공포를 견디고 관찰했다. 아사(餓死)부터 집단 처형과 아동 교수형까지, 엘리 위젤은 너무 많은 공포를 보았기에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웠다.

고통의 경험이 엘리 위젤의 하나님을 죽였다. 위젤은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용하셨다면 그분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런 고난을 허용하는 하나님은 실재일 수 없다고. 위젤은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웠고 그분이 부재, 불의, 비존재에서 유죄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위젤이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고난의 존재가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의 존재가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오해는 인간이 고난받아 마땅하지 않으며, 선한 하나님은 절대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욥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매우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하나님께서 피고석이 아니라 판사석에 앉아 계신 최종 판결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다.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욥 9:14,15).

욥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에 그 누구도 실제로 무고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욥은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인정하면서, 참으로 선한 사람은 없기에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물음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완전한 빛 아래서, 참으로 무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죄로 얼룩진 사람이며 고난을 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염려나 아픔 없이 살 권리가 없다. 많은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더라도 말이다.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삶은 그 누구의 권리도 아니다. 당신과 나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행동으로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무엇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아픔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가?

그러나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우리는 자신이 이 규정에서 예외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욥의 문제였다. 욥에게 가장 삼키기 힘든 약은 자신의 온전함(integrity)이었다. 그는 이런 고난을 받을 만한 잘못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욥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욥 10:3,5-7

욥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저를 괴롭히십니까? 제게 이런 슬픔을 주시니 행복하십니까? 당신은 사디스트(sadist)이십니까?”

욥처럼, 많은 사람이 고난을 겪으며 대답을 요구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증인석에 세웠다. 아무리 돌아봐도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당할 만한 짓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동을 변론하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전능자께 반대 심문을 하면서 우리는 마치 하나님을 개미탑에 올라앉아 아주 큰 돋보기로 개미들을 태우며 깔깔대는 아이로 그려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부재하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고난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잔인한 의도에서 고난에 임재하시는 것이 틀림없지 않을까?

분명히 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즐거워서 고난 중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임재하신다. 무관심한 신이라면 사탄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할 때 욥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사랑이 많은 우리 하나님은 고난에 한계를 두고, 고난에서 좋은 것을 끌어내신다. 복수심 가득한 신이라면 욥이 처음 자신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그를 치셨을 것이다. 자비로운 우리 하나님은 욥이 불만을 토로하도록 허용하고 나중에 답하신다.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큰 고난이 있는 세상에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부재하고 고난이 없는 세상에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모든 것이 사탄이나 환경 탓이라면, 우리는 고난 중에 두려워할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사탄의 잔혹한 손이나 운명의 잔인한 손보다 사랑이 많은 아버지의 손에 고난받겠다. 나는 사탄의 악의적 주먹질이나 우연의 마구잡이식 망치질을 당하기보다 나를 바로잡는 고통스런 매에 몸을 비트는 쪽을 택하겠다.

나는 타락한 천사의 혐오스런 고문이나 설명할 수 없는 마구잡이식 아픔보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내리시는 벌을 택하겠다. 나는 귀신들의 가학적 변덕이나 목적 없는 우연의 물줄기보다 나를 인도하는 목자의 막대기를 택하겠다.

나는 언제든 나의 고난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택하겠다.

† 말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 시편 33편 13-14절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시편 34편 15절

†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당신의 그 사랑을 오늘도 깨닫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고난 중에 있을 때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 가운데 임재해주셨습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영광에 이르는 길을 닦았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우리에게 임재의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우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고난을 주셨느냐”고요. 그러나 그분 앞에 우리는 늘 유죄입니다. 그분의 형상을 훼손하고, 우리의 허물로 세상을 더럽혔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우리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임재하셨을 때 우리의 비난과 고통을 대신 지심을 기억합시다.


낭독으로 만나는 테마
귀로 들어요~ 갓피플 테마. 눈으로만 읽는 것과는 다른 은혜가 뿜뿜. 테마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고 새롭게 나누어지기를 기도하며, 갓피플 직원들이 직접 낭독했습니다. 어설퍼도 마음만은 진실한 낭독러랍니다^^ 같은 은혜가 나누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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