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똑똑이 :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 – 김동호 크리스천 베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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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독교 대학에서 몇 년 동안 학생들에게 기독교 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었다. 미션 스쿨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기독교 과목 몇 강좌를 필수로 수강하여야만 했다. 학생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있었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학생들도 많았는데,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과목이 즐거울 리가 없었고 따라서 저들 앞에서 강의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강의 첫 시간에 종종 학생들에게 만일 “이 땅에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페이퍼를 제출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에게는 한 학기 동안 강의에 들어오지 않고 시험을 보지 않아도 A학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지만, “이 땅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논증’으로 학점을 딴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불가능한 무신논증

누구나 “이 땅에 신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 대학의 학생들뿐 아니라 이제껏 그 누구도 무신론을 논리적으로 입증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은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수없이 많은 유신논증을 해왔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유신논증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존재론적인 유신논증’이다. 존재론적인 유신논증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공리(公理) 중에 하나는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라는 말과도 같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그것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 반드시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존재 원인은 반드시 밖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철학에서는 “존재의 원인이 타자(他者)에게 있다”는 말로 설명한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이 땅에 없고 반드시 모든 존재하는 것은 타자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필이 있다고 하자. 그 연필이 존재하게 된 원인은 연필 스스로에게 없다. 누군가가 그 연필을 만들었는데, 그 누군가가 연필에게는 타자이고 그 타자가 연필의 존재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존재의 원인이 타자에게 있다.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부모가 존재의 원인이다.

나의 존재 원인은 부모이다. 그러나 부모도 스스로 존재한 존재의 제일원인(第一原因)은 아니다. 부모도 그들의 부모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그 부모도 또 그들의 부모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존재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게 되면 우리는 끝없는 여행을 계속해야만 한다.

유신논증이 합리적이다

결과가 있다는 것은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끝이 있다는 것은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공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첫 원인이 되는 첫 존재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그 이전에는 그 어떤 존재도 없었던 첫 존재였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그를 ‘제일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제일원인은 논리적으로 존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어야만 한다.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첫 존재는 존재의 원인이 타자에게 있지 않고 스스로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그래서 철학은 ‘제일원인’을 ‘자존자’(自存者)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제일원인과 자존자를 신(神)이라고 지칭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논리적인 작업을 통하여 신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논증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유신논증’이다. 그 밖에도 이 땅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신논증은 얼마든지 있다.

깊이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냥 무조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이성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고,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들은 마치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무신론처럼 비과학적인 억지는 없다.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이 땅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믿어야 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유신논증에도 한계가 있다.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유신논증으로 이 땅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입증할 수 있으나 그 신이 과연 우리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인지 아닌지는 논리적으로 입증하거나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신논증은 가능하나 하나님논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신논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틀렸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 어떠한 말로도 대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에 대한 신앙은 어떠한 논증을 통해서도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은 우리의 이해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해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신은 무한 세계의 존재요 우리는 유한 세계의 존재이다. 유한은 무한을 품을 수 없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은 우리의 이해 안에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 밖에 계시는 진리이시다. 이해 밖에 계시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비밀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진리가 많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이해되는 진리보다 이해되지 않는 지혜가 오히려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무조건 진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요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진리도 중요하지만 좀 더 중요한 진리는 거의 다 우리 이해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이해 밖에 있는 진리를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는가? 우리의 이해 밖에 있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있는가? 있다. 우리의 이해 밖에 있는 진리를 우리 것으로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은 ‘믿음’뿐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다니는 교회를 처음 찾아갔을 때 분명히 교회로 가는 길을 잘 몰랐을 것이다. 누군가가 길을 일러주었을 것이다. 약도를 그려주었을 수도 있다. 그때 당신은 그 약도를 알고 갔는가? 믿고 갔는가? 처음엔 누구나 믿고 가는 것이다. 그 약도가 맞을 것이라고 믿고 갔을 것이다. 그 약도대로 갔더니 교회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교회 가는 길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길을 믿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알고 간다. 이해로 믿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진리도 다 믿음으로 이해에 이른 것이다.

이해를 통하여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는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이지 이해를 통하여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안 돼서 못 믿겠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보여주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보이는 것이다.

믿고 시작해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면 그 실상과 증거가 나타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 증거와 실상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 증거와 실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 증거와 실상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믿음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판별할 수 있다.

믿음으로 이해에 이를 수는 있으나 이해로 믿음에 이를 수는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이해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시지 않았다. 성경의 제일 첫 장 첫 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시지 않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논증하는 글이라면 그 말씀은 맨 마지막에 나와야만 하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입증한 후에 “그러므로 이 세상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써야 할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성경의 맨 끝에 쓰지 않고 성경 맨 처음에 쓰셨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은 증명이 아니라 선포이며, 이해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선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 입문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고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우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밭에 심는다. 그리고 나중에 그 열매로 나타나는 증거와 실상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면 된다.

약도를 믿고 약도대로 갔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 약도는 틀린 것이다. 그 약도가 가리키는 길은 틀린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약도를 믿고 약도대로 갔더니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면, 그 약도는 맞는 것이다. 그 길이 맞는 사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증거가 나타날 것이다. 실상이 나타날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증거와 실상은 눈에 보인다. 그 실상과 증거를 통하여 우리 믿음이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은 믿음에서부터 시작하지 이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믿음으로 시작하자.

내용발췌 : 크리스천 베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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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베이직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서술한 책이다.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조직신학적인 공부가 한 번은 꼭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균형 잡힌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둥과 뼈대를 세우지 않고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튼튼하고 반듯한 신앙생활이 어려워진다. _ 개정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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