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학의 말과 말씀] 마라강의 누우는 마라의 쓴물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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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문학과경계사, 2004)

현대자동차의 누우 엔진은 기존의 베타엔진을 대체하기 위해서 독자 개발된 국내 엔진이다. 2016년 세계 10대 엔진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동물의 이름을 딴 최초의 엔진이라고 하는 누우 엔진이 추구한 강인함은 아마도 누우의 심장에서 차용한 것 같다. ‘누우~ 누우~’하고 운다고 해서 ‘누우’라고 불리는 이 동물은 생김새는 물소와 염소를 합친 것 같은 강인한 모습이지만 사실은 매우 겁도 많고 나약한 천상 초식 동물이다.

이 시의 초반부에 나오는 ‘화면(畫面)’이란 말로 보아, 화자는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불가뭄이 내린 케냐의 한 초원,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는 마라 강가에 갈비뼈가 등가죽을 찢고 나올 것처럼 앙상하게 말라붙은 누우들 수십 만 떼가 멍하니 서 있다. 세렝게티 평원에 건기(乾期)가 찾아와 온 대지가 메마르면 누우들은 살기 위해 강을 건너야만 한다. 새로운 초원을 찾아 떠나는 누우 떼들은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그야말로 대장관을 연출한다. 그런데 누우 떼들이 도착한 강둑 저편에는 이들을 노리는 악어 떼가 기다리고 있다. 마라 강은 누우들에게는 곧 삶과 죽음의 경계이다.

그러나 새로운 초원으로 가기 위해선 이 죽음의 강은 필연적인 통과 의례이다. “투둑 투둑~” 두 발로 강둑의 땅에 헛발질만 할 뿐 그 어떤 놈도 선뜻 강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그때, 무리 중의 몇 마리가 스스로 악어에게 몸을 던진다. 게다가 그 누우들은 최선을 다해 악어와의 혈투를 벌인다. 나머지 무리들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악어에게 살점을 물어뜯기는 고통을 더 길게 연장하는 이 비장(悲壯)한 장면 앞에서 누가 그 누우를 한낱 짐승의 본능이라고 폄훼할 수 있을까? 이 시를 읽자 바로 떠오르는 독일 시인 브레히트(1898~1956)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가슴에 서늘한 흔적 하나를 새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 시는 내가 운이 좋았었고, 강했었다고 강변할 수 없게 만든다. 누군가의 희생(犧牲, sacrifice)을 대가로 한 생존은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안겨 준다는 분명한 감정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 희생을 담보로 해서 이 땅에 살아남은 자들은 세 가지 선택의 기로(岐路)에 서 있다.

평생을 ‘자책(自責)의 회한(悔恨)’으로 눈물짓는 첫 번째 선택과 매 순간을 ‘감사(感謝)의 기회(機會)’로 승화시키는 두 번째 선택. 아니면 ‘망각(忘却)의 피안(彼岸)’으로 깔끔하게 치워버리는 맘 편한 선택이 바로 그 것이다.

불가뭄을 피해 새로운 목초를 찾아 떠난 누우들 앞에 호젓한 케냐의 마라 강이 펼쳐져 있듯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광활한 수르(Shur) 광야가 펼쳐져 있었다. 도착한 수르광야에서 3일 동안 아무리 찾아도 물을 구할 수가 없었던 그들은 쓴물로만 가득 들어찬 그 곳 마라(Marah)에서 온갖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불평하는 백성들을 대신해 지도자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울부짖음뿐이었다. 그 응답으로 모세가 받은 것은 나뭇가지 하나였고,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더니 그 쓰디 쓴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게 그 마라(Marah)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한 법도와 율례를 만들고 시험하신 장소가 된다.

그 후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홍해에서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곳 물은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라라 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우리더러 무엇을 마시라는 말입니까?”라고 불평하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와께 울부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달게 됐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법도와 율례를 만들고 그들을 시험하신 장소가 이곳 마라였습니다. (출15:22~25)

케냐의 마라 강과 수르 광야의 마라, 공교롭게도 동명이지(同名異地)의 이 곳에서 더 공교롭게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절망과 죽음의 물 안으로 누군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동료를 살리기 위해 케냐의 마라 강으로 뛰어 들어간 누우의 본능과, 수르 광야의 마라에 던져진 나뭇가지 하나가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쓰디 쓴 죽음의 물 분자가 달디 단 생명의 물 분자로 바뀐 비결은 나뭇가지 하나이다. 그 나무에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었던 것일까? 문제의 해결책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통해 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가리키는 한 나무가 있다. 우리의 쓴 물 인생을 단물 인생으로 바꿔 내는 다른 한 나무 바로 십자가이다.

“그분이 친히 나무에 달려 자기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벧전2:24)

죄로 말미암은 쓰디 쓴 저주의 인생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고 이 땅에 내려와 스스로 달리신 저주의 그 나무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악어 떼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누우 떼들 옆에서 과감하게 강둑을 박차고 날아 오른 그 마라강의 누우들은 어쩌면 이미 그 마음을 알았었는지도 모른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하나를 나무에 못박아버리는 방법밖에 없는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 말이다. 그 방법 외엔 메마른 광야 땅에 속절없이 방치된 마라의 쓴 물은 결코 회복될 가능성이 정확히 ‘0(zero)’이라는 진실은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던가.

글 : 곽상학
현직 공립학교 중등교사이면서 청소년 사역자인 저자는 ‘뻔하지 않게, 펀(fun)하게’를 모토로 언제 어디서나 유쾌함을 몰고 다닌다.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저자는 진정한 프로(P.R.O.) 사역자이다. 국어, 중국어, 상담, 교육학, 종교학, 진로 등 중등교사 자격증만 6개가 있을 정도로 열정(Passion)의 교사이자,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변화시키는 개혁(Revolution)의 사역자이며, 아이들을 공감하고 소통하기 위해 항상 몸과 마음이 열려 있는(Openness) 네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올해의 모범교사’와 ‘수업명인’으로 선정되었으며, 학교폭력예방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자는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총신대학교 교육대학원(기독교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현재 새롬중학교 진로교사이면서 강동온누리교회 파워웨이브 교육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밖에 유스 코스타(Youth Kosta) 강사, 군부대 사역, 어린이와 청소년 집회 인도자, 부모 교사 세미나 강사 등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 《청바지: 청소년을 바라보는 지혜를 입어라!》(두란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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