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 로마서 4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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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1-3


1 그런즉 … 하리요 바울은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증을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증거는 그 내용과 인물 면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에 너무도 잘 들어맞기 때문에 충분히 결정적이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이었다. 또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없다.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에서는, 하나의 실례만으로 일반적인 규범을 만들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게서는 모든 교회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의의 모범 혹은 모형이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브라함 한 사람에 대해서만 기록된 내용을 교회의 몸 전체에 적용한 것은 옳은 일이다.

동시에 그는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가장 그럴듯한 자랑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을 이 실례를 통해 견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족장인 아브라함보다 자기들이 더 고결하다고는 감히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기들 나름의 의를 주장하는 그의 후손들은 수치심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었어야 마땅하다.

육신으로 바울의 글에는 ‘육신으로’라는 말과 ‘조상’이라는 말 사이에 ‘휴레케나이’hurekenai라는 동사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뜻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해석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아브라함은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는가’를 묻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 주해가 인정을 받는다면, ‘육신으로’라는 말은 ‘선천적으로’ 또는 ‘그 자신으로부터’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육신으로’라는 단어는 형용사구로서 ‘조상’이라는 말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예를 통해서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여기서 유대인들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 민족의 존엄성이 이 단어를 통해 다시 한번 생생하게 언급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경멸의 뜻으로 덧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다른 구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이런 경멸적인 의미로 ‘육적’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영적이지도 않고 적법한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육신으로’라는 표현이 여기서 사용된 것은 그것이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해당되기 때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육신의 혈통을 따라 나면서부터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도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더 가까운 결속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한 유일한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 조상의 본本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그들에게 더 깊이 각인시켜주기 위함이다.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이 구절은 미완성된 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마무리가 되어야 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그는 자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라는 어구는 삼단 논법(대전제, 소전제, 결론의 세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추리 방식)의 소전제小前提인 셈이다. 논증이 완성되려면, 여기에 내가 앞에서 진술한 결론이 덧붙여져야 한다. 물론 바울은 그 부분을 표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보상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척할 때, 그는 그것을 ‘자랑’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에게도 자랑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우리 중 누가 스스로에 대해서 눈곱만큼의 공로라도 주장할 수 있겠는가?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랑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 그의 소전제 혹은 가설假設에 대한 증거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는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할 뿐, 자기 자신에게서 그 어떤 것도 들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얻는 의’는 내세울 행위가 없는 죄인들을 위한 구호救護 처소이자 피난처라고, 바울은 생각하고 있다.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은 혹은 행위로 말미암은 의義가 있다면, 그 의는 인간 자신 안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얻는 의를 ‘전가된 것’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정당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말씀에서 ‘믿는다’는 단어를 어떤 특정 어구를 믿는 것으로만 제한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단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해한 구원의 언약 전체와 양자됨의 은혜를 가리킨다. 물론 창세기 본문에 장차 얻게 될 씨에 대한 약속이 언급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값없이 양자 되게 해주시는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는 구원의 약속도 없고 구원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도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혹은 구원의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는 반드시 그 부르심과 함께 우리에게 제시되는 의를 가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입장을 취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해진다. 즉, 바울이 모세가 기록한 이 구절을 그 문맥에 상관없이 왜곡해서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 특별한 약속이 진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는 면에서 존경할 만한 바른 행동을 취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점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잘못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믿으매’라는 말이 문맥 전체에까지 미치는 것이라서 그것을 하나의 문장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해서 보면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실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분의 자녀로 양자 삼는 것과 아버지로서 베푸는 은총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좀더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이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제시된 그 은혜를 믿음으로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는 그 은혜가 무효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면, 그 의의 유일한 근거는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그분으로부터 받을 것을 담대하게 소망했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모세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그가 어떤 자로 여겨졌는지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약속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의가 전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에 대한 개념을 가지기 위해서는 약속과 믿음의 이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법률상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의가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의를 얻는다.

그리고 우리가 의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는다. 나는 이 구절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야고보의 주장과 이 구절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셔서 내가 야고보서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충분하게 설명하려 한다. 지금은 그저 의가 전가된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만 주목하자.

왜냐하면 바울은 이 두 표현을 동의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쟁점이 되는 것은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양심의 순결함과 삶의 온전함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과 구별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는지 그 이유를 물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의 의로 옷 입히시는 분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4,5


4 일하는 자에게는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앞 다투어 추구해야 할 그런 선한 일에 열심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하는 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다.

그가 의미한 바는 자기 자신의 일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을 아니하는 자’라는 표현은 자기 일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자들이 나태하게 빈둥거리는 모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가對價를 바라는 식의 태도, 곧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청구하듯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쟁점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규제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 구원의 이유에 관한 것이라고 이미 밝혔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갚듯이 의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주시는 것임을 역逆으로 논증한다. 나는 바울의 논증 형태가 단 하나의 어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문장 전체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이 구절을 표현한 부처의 의견에 동의한다.

“자기 일로 어떤 공功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공은 값없이 그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것은 믿음이 우리에게서 어떤 공로를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므로, 바울은 항상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로 삼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한 우리의 속죄물이 되신다는 사실 외에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이 동일한 진리가 갈라디아서 3장 11, 12절에 다른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은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서 바울은, 믿음에서 난 값없는 의는 행위에서 난 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만일 믿음이 행위에 근거해서 사람을 의롭게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서 난 의와 행위에서 난 의에 대한 이 비교를 잘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어떤 공로 이야기도 전혀 들먹일 수 없을 것이다.

 


5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이것은 완곡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굉장한 강세 효과를 내는 어구이다.

바울은 이 표현에서 믿음과 의, 이 둘의 본질과 속성을 다 표현하고 있다. 믿음이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것이 칭찬 받을 만한 미덕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때문임을 그는 분명하게 밝힌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의를 주시는 분이라고 진술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불의하다고 책망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우리의 궁핍함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경건하지 않은 자라고 실제로 느끼는 사람만이 믿음에서 난 의를 얻을 것이다.

이 완곡한 표현은 ‘믿음은 다른 데서 난 의, 즉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의로 우리를 돋보이게 한다’는 본문의 주제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값없이 용서해주실 때, 그리고 마땅히 진노를 발해야 할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랑으로 은총을 베풀어주실 때, 다시 말해서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불의를 폐하실 때,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이라고 다시금 여기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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