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파노라마 #11] 구약성경 각 권의 핵심주제(에스더~말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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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서 – 성전 재건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바벨론과의 전투에서 폐허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예루살렘으로 보내(1차 포로귀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다. 80년 후에 학사 에스라는 본국으로 귀환하여(2차 포로귀환) 성전 재건 과정을 기록했고, 백성들을 이끌어 대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느헤미야서 – 성벽 재건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갔던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3차 포로귀환) 52일 동안의 열띤 작업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게 하셨다. 이후 에스라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성회(聖會)를 인도했다.

에스더서 – 유대인들이 위기를 모면함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스룹바벨을 시켜 성전을 재건하게 하는 동안, 사탄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에서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하만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표(意表)를 찌르셨다. 에스더라는 유대 여인을 페르시아의 왕비 자리에 앉힘으로써 택하신 백성들을 구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던 구약의 역사 이야기가 이 책에서 중단된다. 이후에 나오는 모든 책들은 앞에 있는 책들을 보충 설명한다.

욥기 – 하나님과 고난

욥기의 주제어를 ‘고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이야기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광풍 속에서 고난에 대해 가르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셨다. 이 말씀이 주는 좋은 소식은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난의 환경에 처하더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이다.

시편 – 찬양과 탄원

시편은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찬양하는 부분과 더 크게 역사해달라고 간청하는 부분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진다.

나는 특히 다윗의 시편을 묵상할 때 편안해진다. 다윗의 시편들은 크리스천들 안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아름다운 조화를 나타낸다. 다윗은 어떤 구절에서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신속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간절하게 구하고 또 다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하시는 일들과 장차 하실 일들에 대한 감사와 확신의 태도를 보인다.

당신의 기도는 “감사합니다”와 “도우소서”, “사랑합니다”와 “주소서”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잠언 – 생활 속의 분별

잠언의 915개 구절에는 분별력 있고 유익한 삶을 위한 실제적인 지침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금지와 권고의 명령으로 적절히 배분된다. ‘분별’은 ‘지혜’의 동의어로 창조주께서 설계하신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기술을 의미한다.

우리는 잠언이라는 ‘캡슐’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위한 비법을 한꺼번에 발견할 수 있다.

전도서 – 인생의 무가치함

때늦은 깨달음이 언제나 깊은 인상을 남기는 까닭은 ‘아픔’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솔로몬의 전도서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전도서를 읽다보면 성공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현대인들도 기꺼이 동의할)을 나열한 목록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솔로몬은 지혜, 쾌락, 부귀, 일, 친구, 인기, 우상숭배, 결혼, 자녀, 지위 등을 최고의 선(善)으로 여겨 모두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그 모든 게 허망하다고 선언했다.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이 하나같이 인생의 목적으로서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시적인 것들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치 비눗방울을 잡으려는 행동과 같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 ‘수확체감의 법칙’을 체험하게 된다.

노력을 할수록 오히려 만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아가서 – 결혼생활의 성

30세 미만의 유대 남자들은 결혼생활의 성(性)에 관한 입문서 격인 이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결혼한 부부만을 위해 온전한 기쁨을 설계해놓으셨는데, 이것에 대해 왜곡된 부분을 이 책을 통해 교정하기 원하셨다.

이사야서 – 이스라엘의 고난과 영광

이사야서는 성경 66권의 축소판이다. 66장으로 이루어진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겠지만 그 시기가 지나갈 것이라고 예언하는 내용 39장(구약의 권수)과 장차 메시아의 왕국에서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하는 내용 27장(신약의 권수)으로 나누어진다.

이처럼 이사야서의 이 두 가지 ‘약속’은 분량이나 주제 면에서 구약과 신약에 상응한다. 이사야서의 후반부는 다시 9장씩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의 단편들이 찬가로 끝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후반부의 중심에 위치한 이사야서 53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기록한다. 우리는 이사야서 후반부가 약속하는 영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현재 받고 있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예레미야서 – 유다의 포로 됨과 귀환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을 확정된 사실로 명확히 선포한 탓에 인기투표에서 그만 꼴찌를 차지하고 말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전에는 정복자들에게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이후로는(30장 이후) 포로로 끌려간 동포에게 타국에서 정착하여 70년을 잘 견뎌야 한다고 위로했다.

그들은 반드시 돌아오겠지만 금세 돌아오지는 못할 운명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징계를 내리신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애가 – 예루살렘에 대한 비가

이 책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공과 약탈에 대한 예레미야의 목격담으로, 성경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고난을 몹시 슬퍼했기 때문에 ‘눈물의 선지자’로 불렸다. 백성들은 평화롭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설교를 무시하고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정통 유대교도들은 옛날 성전이 있던 자리 서쪽에 남아 있는 통곡의 벽(AD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이 부분만 남겨두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에 ‘이합체’(離合體, acrostic)로 된 예레미야애가의 내용을 기록해놓고 지금도 읽으며 암송하고 있다.

에스겔서 – 성전에 대한 기대

에스겔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유다의 징계에 대해 먼저 설명한 뒤에 기쁨에 대해 설명했는데,

각각 24장씩 균등하게 배분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 책의 클라이맥스이자 핵심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사람들이 더럽힌 성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떠나셨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고향을 등지고 타국으로 향해야 했다.

곡(Gog)과 마곡(Magog)은 하나님께 대적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는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데(겔 38:1-39:16), 이들과의 대대적인 전쟁은 장차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것이며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대규모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길을 예비할 것이다.

다니엘서 – 이방 세계의 운명

에스겔이 성전에 대한 기대를 진작시켜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을 동안, 다니엘은 바벨론 왕국의 권력자들에게 이방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했다.

이 책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네 제국에 관한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예언으로 인하여 성경 비판자들의 소굴에 끌려가 불신과 비판을 받았다. 비록 이방 세력들이 한시적으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린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방 세력들을 다스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권능으로 이루실 것이다.

호세아서 – 거룩한 심령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명기와 유사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시며 절대적으로 사랑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지만 인간의 최선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완전하지 못한 것을 묵과하지 않으신다.

이에 하나님은 회개한 반역자들에게 사랑으로 ‘의로움’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신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언제나 회개가 문제가 된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재결합’이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음란한 창녀 고멜과 결혼하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모셔야 한다.

요엘서 – 하나님의 심판의 날

요엘의 시대에 파괴적인 메뚜기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것은 유다를 침략하는 이방 군대가 하나님을 저버린 유다에게 할 일들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경고가 다 그렇듯이 여기에도 회개에 대한 보상으로 용서와 구출의 약속이 동반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집스럽게 회개보다는 심판을 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남은 자’들을 위해 희망을 제시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자들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지만, 돌이켜 하나님의 길을 신뢰하는 자들은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모스서 – 율법에 대한 태도

사람은 손으로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마음으로 죄를 범한다.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가 결국 문제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아모스는 출세를 노리는 야심가들을 암소에 비유했는데(암 4:1),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의 삶의 수준이 아모스 선지자의 엄한 눈에 미치지 못했다.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질수록 아모스의 설교도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방자한 백성들에게 소망을 제시해주셨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의 태도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신다.

오바댜서 – 에돔의 멸망

오늘날의 요르단 남서쪽에 페트라(Petra)라는 도시가 있다. 붉은 암석 벼랑을 깎아 건설된 이 고대 도시는 한때 에돔의 수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여우와 독수리들만이 사는 유적지로 남아 오바댜 선지자의 예언의 정확성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에돔이 무슨 엄청난 죄를 지었기에 그 땅과 백성들이 이렇게 망한 것일까? 왜냐하면 그들이 형제 민족인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을 때 돕지 않고 오히려 유대 민족을 공격하는 나라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에돔 민족이 에서의 후손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요나서 – 니느웨에 미치지 않은 심판

어떤 사람들은 요나서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이적은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니느웨 주민들이 회개하고 영적 부흥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님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는데, 정치 지도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를 구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도무지 회개할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용서받을 게 싫어서 불순종했던 요나 선지자를 독려하여 옳은 일을 하게 만드셨다.

미가서 – 사회의 도덕성

북이스라엘에 아모스 선지자가 있었다면 남유다에는 미가 선지자가 있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유다 사회의 구석구석을 조사한 미가 선지자는 남유다 백성들의 도덕성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가 선지자는 메시아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새로운 사회만이 궁극적인 해결 방안이 될 것이라 지적했다.

한편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의 한 아기(미 5:2)로 더불어 이 중단된 과정을 다시 시작하실 것인데, 그 아기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주권자가 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장차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실 나라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지금부터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훔서 – 니느웨에 임박한 심판

부흥의 기운은 보통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던 니느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100년가량이 흘렀을 때, 앗수르의 죄악의 잔은 다시 넘치기 시작했고 그들의 파멸도 임박했다. 나훔 선지자는 해자(垓字, 성 둘레를 판 못)와 벽과 망루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니느웨가 어떻게 불과 물로 멸망할지 예언했다.

인간의 방비가 아무리 견고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비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뿐이다.

하박국서 – 인간성과 하나님의 주권

유다 사회에 죄가 창궐한 것을 목격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인지 의아했다(오늘의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세워 유다를 심판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셨을 때, 그의 의문은 더욱 증폭되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도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침략자들 또한 때가 이르면 그 죄로 인해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어떤 민족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 민족이 신성하게 되거나 심판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정직한 의문에 응답하신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를 꾸짖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가 정해놓은 틀 안에 넣고, 오직 그런 방법으로만 역사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나 성품을 거스르지 않는 동시에 자기 방법대로 자유롭게 일하신다.

스바냐서 – 시온의 남은 자들이 구원 받을 것임

사회가 아무리 부패할지라도 좁은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기 직전에 스바냐 선지자는 구속 받은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백성들을 격려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비와 햇빛을 골고루 내리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다.

유다 백성들은 곧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습 3:17)을 70년 동안 새기고 또 새기면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스바냐 선지자가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잊지 않으셨으며 능력을 잃지 않으셨다. 때가 되면 그들을 구할 계획을 갖고 계셨다.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에 열중하셨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기뻐하셨다.

학개서 – 하나님의 집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스룹바벨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며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를 받았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이 무너진 채로 있는데 잘 꾸민 집에서 사는 것이 옳은지 꾸짖으며 하나님의 전(殿)을 세우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학개는 고향에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근면하게 일했지만, 이에 상응하는 만큼의 소득을 얻지 못한 까닭이 바로 성전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명확히 짚어주었다. 하나님의 일은 멀리하고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복을 빼앗겨 ‘자기 파멸’을 초래하고 만다. 학개의 설교는 마태복음 6장 33절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 어느 시대에나 합당하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기꺼이 공급해주실 것이다.

스가랴서 – 시온의 남은 자들이 구원 받을 것임

스가랴 선지자는 시간의 복도 저쪽 끝에 있는 메시아의 ‘두 번의 도래’에 주목하면서 특별히 두 번째 오심을 강조했다. 유다 백성들이 육체로 일하며 시온산에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일에도 관심을 갖고 계셨다.

이 재건된 성전은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보다는 작을지 몰라도 그 영광은 그것보다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세주께서 이 성전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헤롯 성전은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을 꾸미고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꿈이나 추억에 비해 너무 작아 보여 실망한 적은 없는가? 특히 사탄이 당신의 실패를 상기시키거나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할 때 낙심한 적은 없는가? 그렇다면 스가랴서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기 바란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비밀한 일을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당신을 통하여 이루실 것이다(렘 33:3).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실망시켰던 사람들을 통해(요나와 니느웨를 기억해보라) 가장 큰 일들을 이루셨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맞추면 크나큰 소망을 얻을 수 있다.

말라기서 – 메시아 이전의 사자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 시대 예언의 마지막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음 장면을 위해 무대를 다시 배열했다. 주인공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인공에 앞서 오게 될 사자(말 4:5, 눅 1:17), 곧 세례 요한이 건네받았다.

또한 말라기 선지자는 아브라함 이후 2천 년 동안 계시와 구속과 부흥을 다시 목격했던 하나님 선민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묘사했다. 사람들은 냉소적이고 독선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하나님을 회피했다.

메시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럴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로 시작하는 구약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 끝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사실이다.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 구절을 보라. 이것이 축복으로 끝나는 신약의 마지막 구절과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지 주목하라.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계 22:21).

아브라함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진리가 허구보다 더 낯설다”라는 속담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우리의 개인사는 어떤가?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불변하시는 분인가?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지금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변덕을 부리지 않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이적을 행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적을 체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투덜거리지 않는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여전히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씀을 듣거나 읽기를 거부하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쉽게 배울 수도 있고 어렵게 배울 수도 있다. 이것을 어렵게 배워야 했던 사람들을 통해 쉽게 배울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반항과 거역의 길을 걸으며 어렵게 배울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통해 유익을 얻으며 쉽게 배울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쉽게 배우든 어렵게 배우든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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