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파노라마 #15] 구약성경의 생활 원리 2 – 사무엘하~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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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 죄는 용서받아도 징계는 피할 수 없다

사무엘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왕이다(행 13:22). 그러나 다윗은 이웃 여인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바로 그 시점을 기준으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무엘하 1장에서 10장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새로운 패자로 급속히 부상하면서 그 영역 또한 어느 때보다 확장되어 애굽에서 유프라테스에 미쳤다. 또한 다윗이 세운 새로운 수도이자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막대한 부와 조공물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사무엘하 13장부터는 모든 상황이 앞부분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며 진행된다. 이스라엘은 정복한 땅을 외적들에게 도로 빼앗겼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부친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도성 밖까지 추격했다. 또한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제 아비의 후궁들과 동침했다. 이와 같이 다윗은 근친상간과 가족 간의 유혈 참극을 목격해야 했다.

어느 날 밧세바와 가졌던 쾌락적인 죄의 결과로, 다윗의 인생은 기쁨의 삶에서 통한의 삶으로 바뀌었다. 다윗은 자신의 더러운 발자국을 덮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고통만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가 나단 선지자를 대면하여 자신의 중대한 죄악을 지적받았을 때, 가슴을 치며 회개함으로써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임을 입증했다(시 32,51편).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는 용서받아도 징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셨다(삼하 12장).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셨다고 말했지만 간통으로 낳은 아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며, 칼이 다윗의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이 다윗의 아내들을 빼앗아 백주에 욕보일 것이라고 선고했다. 사무엘하 13장에서 24장까지는 이 모든 예언들이 하나하나 성취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께 대한 순간의 죄악이 가져오는 장기적인 결과를 숨기는 기만의 명수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값 없이 오는 것이므로 죄 또한 값 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식의 삶을 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는 갈보리 십자가에 대한 명백한 왜곡과 모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외아들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면, 완전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외아들을 희생하는 것만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도 징계를 받지 않고 멀쩡히 살아가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삼하 12: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시지만 또한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하신다. 만약 내가 은행을 턴 후에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감옥에 가거나 강탈한 돈을 변상함으로써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일평생 담배를 피워온 사람이 갑자기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폐암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습관이 질병을 몰고 오는 것처럼 죄는 용서받아도 징계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못마땅한 마음으로 억지로 용서하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싫어하심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피조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을 징계하신다(잠 3:11,12).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된 모든 믿는 자들의 선한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가르침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지 시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실 때 언제나 사랑을 다시 확신시켜주신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를 어떻게 격려하셨는지 보라. 그들이 낳은 아기는 죽었지만, 다윗은 세상을 떠난 그 아기가 천국에 갔음을 확신했다(삼하 12:23).

다윗과 밧세바가 다음에 낳은 아이는 솔로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삼기로 선택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어떤 왕보다도 더 지혜롭고 부유한 왕이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뜻으로 “여디디야”라는 별명을 지어주셨다(삼하 12:24,25).

역대상은 다윗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해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다윗이 생전에 범했던 한 가지 죄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 한 가지 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다윗이 밧세바와 저질렀던 부정한 사건은 이 신성한 기록에서 완전히 빠졌다. 인간들이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은 뒤에 묵묵히 징계를 감내한 두 자녀(다윗과 밧세바)에게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줄 수 있었을까? 여기에 정말 이율배반적인 요소(상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비중을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진리)가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지만(시 103:12),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분명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죄는 용서해도 징계는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삼하 12:13,14).

열왕기상 : 현명한 충고는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안전하다

솔로몬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했다. 르호보암이 즉위하자 왕국의 북쪽에 살던 열 지파의 대표들은 세금 삭감을 강력히 요구했다(왕상 12:1-5). 선왕(先王) 솔로몬이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사업, 관료체제 정비, 성전과 궁전 건축, 군비 확장 등으로 세입 규모를 급격히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르호보암은 선왕 시대에 행정부를 관장하던 지혜로운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세금을 내려주면 백성들이 왕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왕상 12:7).

그런데 르호보암은 자기와 함께 성장한 소년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노인들에 비해 안목이 짧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들에게 엄하게 말하세요. 세금도 대폭 인상하고요. 누가 대장인지 처음부터 확실히 보여줘야 해요. 하나를 주면 열을 달라고 할 테니 백성들이 우습게 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현명한 충고를 저버렸고, 마침내 왕국은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북쪽 열 지파는 르호보암에게 세금을 바치기를 거부하여 르호보암이 보낸 강제노동 감독관을 살해했고,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했다. 그때부터 200년 동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동맹자라기보다 원수에 가깝게 지냈다.

솔로몬은 교훈과 경험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자기 아들에게 현명한 조언자(counselor)의 가치를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구약의 ‘잠언’은 솔로몬이 그 아들에게 쓴 것으로(잠 2:1), 아마 그 아들이 르호보암이었을 것이다. 성구사전을 이용하여 왕위를 연상시키는 잠언의 인용구절들을 검토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잠언의 목적은 그 책을 읽고 주의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심어주는 데 있다. 솔로몬은 “조언자가 많으면 안전하다”라는 원칙을 세 번이나 강조했는데(잠 11:14, 15:22, 24:6), 각 구절의 문맥은 그가 ‘현명한’ 조언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당신은 읽고 들은 진리를 항상 마음에 새기는가? 그렇지 않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학생들의 학습을 위해 온 마음을 쏟는 좋은 교사이다. 그래서 자신의 학생들이 하늘로부터 온 편지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인생이라는 실험실에서 배우도록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학생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학생들이 선택한 행동의 결과를 통해서도 가르치신다. 아브라함이 현명하지 못한 조언을 마음에 새겨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유발된 것이다. 아랍 민족이 이스마엘의 자손이고 유대 민족이 이삭의 자손이라는 것쯤은 이제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르호보암은 현명하지 못한 충고에 주의를 기울여 왕국을 둘로 쪼개놓았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앗수르에 의해 흩어진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의 자손들이 현재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혜의 원천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자들에게 지혜의 선물을 공짜로 나누어주신다(잠 1:7, 약 1:5). 그리고 때로는 현명한 조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메시지에는 결코 모순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과 성경을 통해 확정적으로 권위 있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지혜는 기록된 말씀과 결코 상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르호보암의 할아버지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19세기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과 몇몇 성경학자들은 다음 시편을 다윗이 기록한 것으로 간주했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조언자)니이다 …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 119:24, 98-100).

지식을 얻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대학에 가거나 책을 읽어라. 지혜를 얻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라. 인생길에서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결정을 위한 특별한 통찰력을 얻기 원한다면 나이 많은 지혜로운 조언자(모사)에게 물으라. 단, 경건하고 영적으로 성숙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대인 성경학자이며 우리 시대의 성경교사인 왈키(Bruce K. Waltke) 교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환경과 조언자들을 사용하셔서 그를 평생의 소명으로 안내하셨는지 간증했다.

청년 시절, 그는 군목에 지원했고 선서식에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보가 도착할 날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괴로웠고, 내면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증대되었다. 자기가 오로지 안정된 삶을 위해 그 길을 가려 한다는 자책감을 벗어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계속 가자니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그만두자니 정부에 불충하는 것이 되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편지가 왔다. 금요일에 명령 전보가 도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금요일이 되어도 그 전보는 도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군목 지원 서류가 분실되었음을 알리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리고 그 통지서에는 아직도 군목에 관심이 있다면 다시 지원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뒤에 지혜로운 크리스천 교사들과 지도자들이 그의 길은 목회가 아니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들은 그가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탁월한 자질이 있다고 강력하게 전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추구해온 목회의 꿈을 접고 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그 조언자들의 지혜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입증하며 지금까지 그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결정 상황에 직면해 있는가? 하나님 말씀을 탐구하며 지혜의 원천을 구하고 있는가? 지혜로운 연장자들의 의견을 귀 담아 듣고 있는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환경을 조성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가? 르호보암의 치명적인 실수로부터 배우라. 현명한 충고는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안전하다.

열왕기하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취하신다

인간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에 속기 쉽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쉽게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간 범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데 그다지 열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판단 아래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순하고 너그러운 할아버지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베드로와 바울은 장차 우리가 하늘의 법정에서 해명할 말들이 하늘의 완벽한 정의와 일치해야 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벧후 3장 ; 고후 5:10,11).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강탈하여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말라기 선지자는 결단코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말 3:1-15). 인간의 사악함은 내세에서는 물론 이생에서도 보응을 받을까? 학개 선지자는 당연히 그렇다고 답한다(학 1:1-11). 인간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들을 자발적으로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거두어가실까? 열왕기하는 그렇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요가 아닌 매우 강력한 권고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강요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요나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요나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를 꺼려할 때, 하나님은 그가 올바른 대답을 얻도록 사흘 밤낮을 가두어두셨다.

열왕기하에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 백성들은 포로가 된다. 여로보암이 반역하여 통일왕국에서 탈퇴한 이후, 총 18명의 왕들이 북쪽 열 지파를 다스렸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을 방문할 경우,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여 예루살렘 순례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단과 벧엘에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을 세우는 동시에 금송아지를 주조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신했다. 이에 레위인들은 항의하며 북이스라엘을 떠났다.

르호보암의 잘못이 여로보암의 잘못을 정당화했는가? 여로보암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무사히 잘 헤쳐 나왔는가? 두 질문의 대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열왕기상 14장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직접 징발하셨는지 확인해보기 바란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들을 탈취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거두어가셨는지 열왕기 두 권과 역대기 두 권을 읽으면서 확인해보기 바란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황충’(말 3:11), 곧 사탄이 징수를 담당하도록 하게도 하신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208년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수확했는지 보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하나님을 떠나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그들을 다스렸던 19명의 왕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악했다는 것이다. 부자간의 왕위 계승은 아홉 차례나 깨졌고, 왕위가 공석(空席)으로 있었던 것이 두 차례 총 20년에 달했다. 19명의 왕 가운데 7명만이 자연사(自然死)했고, 한 명은 하나님께서 쳐서 죽었고, 두 명은 전투에서 전사했고, 한 명은 자살했고, 한 명은 2층에서 떨어져 죽었고, 여섯 명은 살해당했고, 한 명은 포로로 잡혀가 죽었다. 19명의 왕 가운데 12명만이 12년가량을 다스렸고, 한 명은 6개월, 한 명은 1개월, 어떤 왕은 단 일주일간 통치하기도 했다. 19명 가운데 10명이 큰 전쟁에 연루되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과 보화와 재능을 하나님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획득한 것일까? 그들에 대한 기록이 그들을 명백히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라.
하나님을 배신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왕하 17장). 니느웨에 본거지를 둔 앗수르는 고대 근동에서 가장 잔인한 약탈 민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포로들의 손과 발과 코를 잘라냈고 해골을 쌓아 큰 둔덕을 만들기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포가 말뚝에 묶이거나 산 채로 살갗이 벗겨져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앗수르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들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 값비싼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왕국분열 이후 남유다는 다윗의 가계에서 나온 20명의 왕들이 통치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세월을 보냈지만, 그들 가운데 8명만이 하나님께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으면서 각각의 왕들의 치세 동안에 하나님의 징벌과 보상이 어떤 비율로 배분되어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결국 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하나님께서는 두 왕국에 ‘충분히’ 경고하셨다. 분열왕국 기간 동안 두 왕국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들이 무려 3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들 가운데 예언서를 기록하지 않은 이들의 명단을 제시했으니 참조하라(이 표에 나오는 ‘오바댜’와 ‘스가랴’는 성경을 기록한 두 선지자와 동명이인이다). 선지자들은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속 외치는 한편,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맞게 될 정반대의 결과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지내야 할 햇수로 ‘70’을 택하신 것일까? 단지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1,12 ; 29:10)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남유다 백성들이 어떤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죄가 70년의 형벌을 불러온 것일까?

그 대답은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성경의 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역대하 36장 20절과 21절의 요점은 이렇다. 이 땅이 황무해져서 70년 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찾아 누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820년이 넘도록 도둑질한 ‘안식’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모두 따져서 그들의 형벌 기간을 70년으로 정하셨다는 뜻이다!

그들은 땅과 사람들을 7일마다 하루씩(안식일), 7년마다 한 해씩(안식년), 50년마다 한 해씩(희년) 쉬게 해야 했지만(레 23-26장), 대대손손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명을 어겨도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런 속임의 순환 사슬을 처음 시작했던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돌연 벼락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 모세 시대에는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민 15:32-36)을 기억했을까?

초등학교 시절, 나는 완전범죄를 꿈꾼 적이 있다. 우리는 오고 가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리는 곳으로 소풍을 떠났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자전거를 타고 출입이 금지된 웅덩이에서 수영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 리 없었다. 혹시라도 들키면 어쩌나 불안하여 재미있게 놀지는 못했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엉덩이에 빨갛게 회초리 자국이 생긴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큰형은 줄곧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을 전국적으로 범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그들의 걱정과 불안감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조롱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묵인(默認)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벧후 3:9).

하나님이 그들을 참아주신 까닭은 단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환경을 통해 그들을 오랫동안 책망하신 것은 그들을 회개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였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의 빚을 정확히 계수해오셨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안식’을 착복한 그들의 빚이 축적되어 70년의 세월로 갚아야 할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직접 거두신 것이다.

당신은 매우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큰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는 생각에 자족해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스러운 얼굴로 다닌 적은 없는가? 그 일에 대해 정말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또 모든 것을 기록하신다는 사실을 열왕기하의 교훈을 통하여 깨닫기 바란다.

하나님의 ‘묵인’이라고 느껴지는 잠깐의 기간 동안, 하나님은 당신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인내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가 있다. 장차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돌려야 할 것들을 직접 거두실 것이다.

에스라·느헤미야서 : 육적 활동과 영적 활동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땅에 마땅히 돌아가야 했던 70년의 안식을 허락하신 후,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 민족을 3차에 걸쳐 귀환시키셨다. 그 가운데 두 차례의 귀환이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 일부를 이끌고 1차로 귀환한 스룹바벨을 세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산산이 파괴했던 성전을 보수하게 하셨다. 그로부터 78년 후에 에스라는 2차로 귀환하여 영적으로 목말라 있던 백성들을 소생시켰다.

이 책의 제목은 에스라의 이름을 땄지만, 1장부터 6장까지는 스룹바벨이 주인공이고 에스라는 7장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에스라가 돌아오고 나서 14년 뒤, 느헤미야가 세 번째로 백성들을 이끌고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다. 느헤미야의 시대에도 에스라는 백성들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의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에스라서의 성전 재건에 관한 기록과 느헤미야서의 성벽 재건에 관한 기록이 둘 다 비슷하게, 먼저는 육적 활동을 강조하고 나중에 영적 활동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에스라서는 두 차례의 귀환에 대해 기록하는 반면, 느헤미야서는 두 가지의 건축에 대해 기록한다. 에스라서 1장부터 6장까지는 성전 재건에 관해 기록하고, 느헤미야서 1장부터 6장까지는 성벽 재건축에 관해 기록한다. 에스라서 7장부터 10장까지는 백성들의 부흥을 기록하고, 느헤미야서 7장부터 13장까지는 백성들의 영적 재건축에 대해 기록한다.

나는 이 두 권의 쌍둥이 책에서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육적 활동과 영적 활동의 균형이다. 건강한 삶을 위해 육체적인 활동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더욱 가꾸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영적인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지난 한 주간을 돌이켜보라. 당신은 분명 생존에 필요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육체적인 활동을 최소한 몇 가지 이상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난 한 주 168시간 중에서 영적인 삶을 발전시키는 데 몇 시간이나 할애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을 묻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가장 쌩쌩한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는가? 지난 한 주 동안 아버지의 말씀을 얼마나 공부했고 얼마나 적용했고 암송했는가? 기도가 당신 삶의 일부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단순히 무엇을 달라고 간청하는 수준을 넘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목마른 이웃들에게 냉수를 몇 잔이나 건넸는가? 소득을 얻자마자(월급을 받자마자)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렸는가?

‘그리스도인의 섬김’이라는 차원에서 당신은 예배당 건물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갖는가, 아니면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쏟는가? 프로그램과 행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가, 아니면 기도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비중을 두는가?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어느 것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니라 두 가지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균형 잡힌 신앙을 갖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칠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있다.

우리가 영적 성장에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육적인 면이 영적인 면보다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그때그때의 긴급 사항들로 무자비하게 파괴될 것이며 분망함 속에서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한때 나는 목회생활에 눌려 영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빌 가서드(Bill Gothard, 미국의 복음주의 강연가이자 저술가)의 세미나에 참석해 육적 활동과 영적 활동의 균형을 유지하는 해결책을 발견했다. 그는 하루에 적어도 5분 이상 성경을 읽겠다고 서원하라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그까짓 5분이 무슨 도움이 될지 미심쩍었지만, 실천해보니 타성을 극복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탄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어 성경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해 자신의 최고 기술을 구사한다. 우리보다 말씀의 능력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내면 영적으로 무척 쇠약해진다.

아무튼 일단 서원을 하자 그것이 나를 강력하게 몰아붙여서 그로부터 12년 동안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어떤 날에는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딱 5분만 말씀을 묵상하기도 했지만 어긴 날은 하루도 없다. 서원은 결코 가볍게 할 것이 아니다. 서원을 하기 전에 먼저 전도서 5장을 묵상하기 바란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서원을 했다는 것을 날마다 일깨워주신다. 가끔 피곤에 지쳐 서원한 것을 잊고 잠에 빠지려고 할 때면, 내 머릿속에서 “서원했잖아! 서원했잖아! 서원했잖아!” 하는 소리가 마치 북을 치는 것처럼 둥둥 울리기 때문이다. 철면피 고집쟁이 자녀가 아니라면 그렇게 강력하게 일깨워주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외면한 채 잠들지는 못할 것이다. 서원은 타성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심지어 아침에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의 열두 시대를 통해 12가지 생활 원리를 살펴봤다(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생활 원리가 공통이다). 당신이 이 생활 원리를 현실에 적용해야 할 지침이 아니라 학구적인 명제로만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 모든 원칙들을 이행해야 한다는 부담에 지레 위축될까봐 염려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 하나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고 해서, 오늘 할 수 있는 것까지 하지 않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 6장과 7장 도입부에 제시했던 ‘구약성경의 생활 원리’ 도표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한 가지 원칙을 택하라. 그리고 생활에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인 행동 지침 몇 가지를 놓고 기도한 다음 그 원칙을 적어보기 바란다.

성경을 개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신약과 구약을 비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신약과 구약이 강조하는 점은 서로 다르다. 신약의 많은 구절들을 통해 이런 차이점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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